청화백자송죽인물문호(靑華白磁松竹人物文壺), 보물 제644호)
이 백자 항아리는 높이가 47센티미터나 되는 당당한 크기이나 풍만한 어깨선에 비해 잘록하게 급반전된 허리선 때문에 벌의 허리처럼 왜소해 보이기까지 하는 특이한 형태이다. 여기서 매병이 머리에 물동이를 인 한국 여인의 뒷모습을 닮은 형태라면, 이 항아리는 가슴을 강조하기 위해 허리를 사정없이 졸라 맨 코르셋(corset)을 입은 서양 여자를 연상시킨다. 또 형태가 1489년에 제작된 청화백자홍치명송죽문호(국보 제 176호, 동국대박물관 소장)와 매우 유사하고, 값 비싼 코발트계의 청화안료를 사용해 그림을 그린 점으로 보아 조선 전기의 분원에서 궁중 진상품으로 제작된 항아리라고 추측된다. 문양은 소나무와 대나무가 있는 풍경 속에서 독서와 풍류를 즐기는 인물을 묘사했는데, 노송 아래로는 선인이 앉아있고, 대나무 밑에는 거문고를 든 동자를 거느린 한 선비가 속절없이 거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회백색의 태토에 약간 담청색을 띤 백자유가 전면에 고루 시유되고, 빙렬이 없으면서 광택도 좋은 편이나, 15세기의 청화 백자가 선명하고 진한 발색인데 비하여 문양 색조가 엷으면서 흐리고 , 나아가 구도와 인물 배치, 그리고 묘사에서 16세기 후반의 회화적 특징이 강한 작품이다.
100원은 비싸
1929년 어느 날이다. 개성에서 골동품 중개업을 하던 어린 변유식(邊裕植,1912~)에게 막일을 하는 일꾼들이 찾아와 커다란 항아리를 내려놓고 흥정을 벌렸다. 변유식은 개성에서 인삼을 재배하던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1920년 대홍수가 일어나 인삼밭을 모조리 쓸어가 버려자 집 안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되었다. 와중에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까지 신경통으로 몸져 눕자, 변유식은 12살 때부터 물감장수, 성냥팔이 등으로 살림을 이끈 소년 가장이 되었다. 하루는 서울에서 골동가게를 운영하던 이광영이란 사람이 찾아와 “밥 사주고 한 달에 30원의 월급을 줄 터이니 함께 일하자,”고 제의해 왔다. 당시 공무원 월급이 24원 정도였으니, 30원이라면 큰 돈이었다. 이광영이 변유식에게 손을 내민 배경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개성은 고려 오백년의 도읍지로 집집마다 패물이나 노리개, 옛날 항아리들이 많았고, 그것들을 사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하지만 물건을 사려면 금남(禁男)의 장소인 안방까지 들어가 여주인을 만나야 했다. 당시는 성인 남자가 안방으로 들어가면 불륜이란 오해를 받던 시절이라 여주인을 직접 만나기란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학생복을 차려입은 변유식만큼은 거리낌 없이 안방으로 들어가 살만한 물건을 흥정하고 물건을 사서 주인에게 전달했다. 말하자면 어린 학생을 이용해 골동품을 사들이는 작전에 가담한 것이며, 그 과정에서 변유식은 자연스럽게 골동에 대해 눈을 떴다. 그리고 장사 기질이 탁월했던 변유식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독립했고, 개성 남산골의 변유식을 찾아가면 좋은 물건을 살 수 있다는 소문이 서울까지 퍼져나갔다. “이것이 뭐요?”변유식은 바지에 흙이 묻은 사람과 청화백자송죽인물문호를 번갈아 쳐다보며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항아리야. 저기 공사장에서 나온 것인데 안 사?”일꾼이 손으로 가리킨 곳은 학교를 짓던 공사장으로 현재 궁정초등학교 터이다. 궁정(宮亭)은 조선을 창국한 이성계가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기 전 머물던 곳으로, 개성 사람들은 “추궁(趨宮)”이라 낮춰 불렀고, 현재 개성시 운학동에 있는 목청전(穆淸殿)이 아닌가 추측된다. 당시에 궁정소학교는 궁정에서 약 5리 정도 떨어진 민등산에 세웠는데, 터파기 공사 도중에 일꾼들이 이 항아리를 발굴했다는 것이다.
17살의 변유식은 청화백자는 돈이 된다는 것을 서울의 골동상과 거래하면서 이미 알았다. 하지만 희귀성과 청화의 특별함 때문에 부르는 것이 값인 현대의 고소매(古染)같이 대우받던 시절은 아니였다. 머리 속이 자르르하게 절여오자, 변유식은 숨을 참으며 찬찬히 항아리를 살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궁중의 진상품으로 만든 귀한 청화백자가 개성의 야산에서 나올 이유가 뚜렷하지 않았다. “아저씨, 무덤에서 꺼낸 거여요?” 변유식의 눈에는 어느 덧 의심의 긴장이 가득 차 광채를 발했다. 한 점을 잘못 사면 그 날로 망하는 것이 골동계의 생리이다.“아니야. 그냥 산기슭을 파다가 나왔어.”일단, 출토지가 확실하고 또 일꾼의 행세를 보아 거짓말할 사람은 아닐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 이미 가격을 정하고 되물었다.“100원은 받아야 해.”변유식은 헉하고 소리를 내 질렀다. 당시 20평짜지 초가집이 20원 정도면 살 수 있었으니, 초가집 5채 값이었다. 일순간에 기운이 몸에서 빠져나가며 항아리를 땅에 내려놓았다. 그런 거금이 수중에 없었던 것이다. 그 길로 골동품 중개상을 하던 15~20살 위의 선배를 찾아갔다.“형님, 이 물건을 보세요. 100원 달랍니다.”그런데 항아리를 살펴보던 선배가 쥐어박듯이 쏘아붙였다. “너 가만이 있어. 서울서 몰래 사온 물건을 땅에 묻어놓고서 되팔려는 수작이지?”“아니요. 궁정소학교를 짓는 공사장에서 나온 항아리래요.”골동에 일가견이 있던 선배가 뒤로 물러서자, 몸이 단 사람은 팔러 다니던 일꾼이었다. 변유식은 매가 꿩을 낚아채듯 기회를 놓치지 않고서 60원을 불렀다.“5원만 더 보태 줘.” 이런 사유로 이 청화백자송죽인물문호는 변유식의 물건이 되었고, 그는 즉시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일본인에게서 이화여대로
당시는 서울↔개성간 열차가 하루에 12차례나 있어 마음만 먹으면 수시로 오고 갈 수 있었다. 서울에 도착은 변유식은 그 길로 스즈끼(鈴木)을 찾아가 500원을 받고 팔았다. 스즈끼는 일제 시대에 서울에 진을 친 일본인 골동상 중의 한 명으로 영목상점(鈴木商店)이란 골동 가게의 사장이다. 횡재한 돈을 전대에 챙긴 변유식은 그 길로 근사한 양복을 맞춰 입고서 금의환향했다고 증언한다. 그 이후에 이 청화백자항아리는 우영하라는 사람이 소장했는데, 그의 고향은 개성이고, 셈과 장부정리를 무척이나 잘했다고 전해진다. 스즈끼에게서 우영하로 이 항아리가 옮겨간 사연이나 가격은 지금까지 베일에 가려있고, 8.15 해방 후에는 개성박물관을 창립한 박봉진이 소장하였다. 박봉진은 개성에서 거부로 소문난 사람이고, 6.25 이후에는 아현동에서 고무신을 만들던 “경성고무공장”을 경영하던 박봉진의 아들이 소장했고, 그가 죽은 후에 부인과 아들이 장규서(蔣奎緖)에게 팔았다.
장규서는 부산 피난 시절부터 이화여대 김활란(金活蘭) 총장을 도와 이대 박물관의 전신인 필승각(必勝閣)을 설립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고, 처음부터 김 총장과 인연을 맺고서 고미술품 수집 책임자로 활동한 사람이다. 따라서 장규서가 청화백자송죽인물문호를 샀다는 것은 곧 필승각의 자금이 틀림없고, 그런 사유로 현재 이화여대박물관이 소장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사연과 조건으로 이 항아리를 거래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끝- ※참고: 변유식씨의 증언(2002년 8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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