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송리형 토기(美松里型土器)
이 토기는 기원전 10~5세기까지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무문 토기이며, 고조선(古朝鮮) 시대의 토기이다. 1959년 평북 의주군 미송리의 동굴 유적에서 고조선 토기가 발굴되자, 학계에서 붙인 이름이다. 이 토기는 구연부(입 부분)는 넓으나 목 아래로 내려오면서 점점 좁아져 동체부(둥근 몸체)와 연결되었다. 또 동체부는 목부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배가 불러오다가 밑으로 내려가면서 점점 축약된 모양이다. 동체부만을 보면 세로로 타원형을 이루고, 전체적인 모양은 표주박의 위아래를 잘라 버린 것 같은 단지이다. 그리고 제일로 배가 부른 부위에 1쌍의 물동이형 손잡이가 달려 쓰임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언젠가는 빛을 볼 지 모른다
1998년 4월초이다. 「중앙 일보」는 《고조선 토기 3천년만에 햇빛》이란 기사를 독점으로 게재하며, 잊혀진 왕국 고조선을 20세기말의 우리에게 새롭게 각인 시켰다. 의왕시에 사는 김영길(金永吉, 1917~ )이 대를 이어 소장한 토기 7점과 고구려 시대의 금제품들을 공개한 기사이다. 토기가 일상 생활에 쓰인 지 실로 3,000년만에 햇빛을 본 것으로, 근래 보기 드문 고고학적 대 사건이었다. 그 동안 북한과 중국의 논문에 바탕을 두고 근근히 연구되어 온 고조선 연구가 바야흐로 ‘고조선 붐’을 예고하였다. 고고 학계가 흥분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분야의 권위자인 정한덕(鄭漢德) 교수는 ‘미송리형 토기가 여기서 나타나다니…’하며 말을 잇지 못했고, 조유전(趙由典) 관장은 ‘아, 때가 되니 다 나오는구나.’하며 반가움을 표시하였다.
김영길은 강원도 안변에서 김봉명(金鳳明)의 아들로 태어났다. 김봉명은 소금 장수로 주로 청진에서 물건을 사서 압록강․ 두만강 주변의 도시나 만주 지방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았다. 고미술품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장사한 돈으로 다량의 고미술품을 수집해 일제 때에 이미 상당한 양이었다고 한다. 김영길이 그 소장품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은 해방 후의 일이다. 김영길은 17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23살 때에 중앙 대학교 법학과를 들어갔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인민군들이 친일파라고 몰아세웠다. 생각다 못한 그는 1946년 가족을 남겨 둔 채 홀로 월남하였다. 그런데 1947년 서울 집으로 동생인 김영관(金永寬)이 찾아왔다. 그 때만 해도 기찻길은 끊어졌지만 남북 왕래는 비교적 수월했다. 김영관은 부친의 말을 전하며 10상자나 되는 고미술품을 김영길의 집으로 가져왔다. “유물을 가지고 있다가 고생할 수도 있고, 또 서울에서는 빛을 볼 지 모른다.” 그의 부친이 한 말이다. 그렇지만 김영길은 고미술품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 보관만 했다. 난리 통에도 그대로 집에 둔 채로 피난을 갔고, 그 이후는 사회 활동에 바빠서 아예 잊고 살았다. 이 고미술품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은 아들인 김대환(金大煥)에 의해서이다.
김대환은 6년에 걸쳐 전국의 도요지를 샅샅이 답사하며 도자 파편을 수집할 만큼 우리 문화재를 아끼는 사람이다. 현재도 도자사 연구에 꼭 필요한 도자 파편을 시대별로 분리하여 도록을 만드는 중이다. 1993년 한중 수교 이후에 중국과 북한의 문화재 문헌을 보던 김대환은 집에 소장된 고미술품들이 고구려 유물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1994년 〈고구려특별대전〉에 일부 유물을 출품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 전시회는 고구려 산성과 고분 벽화를 위주로 한 전시회였는데, 자발적으로 출품하였다. 1996년 6월, 김대환은 그 동안 소장하던 5세기경의 청동삼환삼족정(靑銅三環三足鼎)을 위시하여 32여 점이나 되는 고구려 유물을 「한국미술품경매전」에 출품하였다. 하얏트 호텔 리젼씨룸에서 열린 경매에서 20여 점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낙찰되었다. 천 년을 넘게 전해져 온 귀중한 유물이 공공 기관으로 들어가 연구 자료로 활용되게 되었다.
출처가 불분명하다
그런데 1년의 세월이 지났을 때다. 고고학계 내에서 학자간에 불협화음이 들리더니, 한병삼(韓炳三)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경매를 통해 구입한 김대환의 소장품이 가짜일지 모른다는 의문을 제기하였다. 심지어 김영길이 인사동 골동 가게를 뻔질나게 출입하는 장사꾼이란 음해도 서슴지 않았다. 이것은 이 나라 고고학계의 해묵은 알력 싸움으로, 김대환은 대단히 화가 났다. 그래서 아버지를 설득하여 비장해 온 나머지 고구려 유물을 모두 공개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왕 공개할 바에는 고구려 연구회의 김희찬 박사가 고조선 토기라고 확인한 것까지 모두 공개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 세상의 의심은 한 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 고조선은 우리 민족사의 원류(源流)로 인식되는 까닭에 학자나 일반인에게 모두 지대한 관심거리이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관심을 가지고,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지적 호기심까지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학자마다 주장이 상이하여 궁금증만 더해 갔다. 명확한 사실로 밝혀진 것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건국 시기만 해도 기원전 4, 5세기경이라는 학설과 기원전 3,000년 이전에 이미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는 등 다양하다. 또한 고조선의 정확한 위치와 그 영토에 대해서도 논쟁이 분분하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반도 안에 위치했다는 학설과 요하(遼河)에서 청천강까지 뻗쳐 있었다는 요동(遼東) 중심설이 혼재되어 주장된다. 어떤 경우는 애국심 논쟁까지도 비화되었다. 최근에는 단군 능(檀君陵) 조성과 함께 북한은 그 중심지를 대동강으로 못박았고, 한국의 학계는 여전히 요동을 그 중심지로 보고 있다. 이처럼 고조선에 대한 역사 해석이 분분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사료(史料)의 부족 때문이다. 그 결과 국내의 고조선 연구는 한마디로 유아기에 머물러 있는 형편이다. 비록 청동기 유물이 남아 있긴 하지만, 대부분 남한 지역에서 출토된 것들이고, 또 일제 시대에 북한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극소수만 남한에 전해질 뿐 정작 미송리형 토기는 한 점도 없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실물 없이 빛 바랜 사진만을 전시해 놓았을 뿐이다. 고조선에 대한 연구는 남한 측보다는 북한 측이 더 적극적이다. 북한 당국은 1959년 미송리 유적을 발굴하고, 이어서 64년에 평북 용천군 신암리 유적을 발굴하는 등 고조선의 연구가 활발하였다. 특히 60년대에 중국과도 협약을 맺어 만주 지역의 고조선 유적을 발굴하고 이때 출토된 많은 고조선 유물을 북한으로 반입하였다. 1993년 단군 능을 조성한 북한은 고조선이 동양 최초로 금속 문화를 창출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 학설을 뒷받침해 줄 만한 역사적 자료는 아직 부족한 상태이다.
김영길이 공개한 고구려 금제품들은 고구려의 공예사를 새로 써야 할만큼 다양하였다. 재까지 고구려 연구는 북한과 중국의 고구려 고분 벽화에만 집중돼 왔고, 최근에는 훼손된 벽화로 한․ 중간에 잡음이 일자 중국 측은 아예 고분 입구를 봉쇄해 버렸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고구려 인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금제품들이 출현하자, 학계는 국내에서도 고구려 연구가 한층 활발해 질 것으로 보고 있다. ‘중간 고리 귀걸이’는 중간 장식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독특한 형식이고, ‘금낚시바늘’은 실 구멍이 없어 부장용으로 별도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어로 생활과 부장 풍습에 대한 새로운 연구 자료이다. 또 금바늘과 금실은 처음 나타난 것들로 출토된 무덤이 왕이나 수장급의 것이었다고 생각 든다.
미송리형 토기와 고구려 금제품들이 공개되자, 연구도 활발해져 서길수(徐吉洙) 교수는 「고구려 수공품에 대하여」, 서영수(徐永洙)․김희찬(金希燦) 교수는 「미송리형 토기와 청동기시대 유물에 대하여」란 논문을 각각 발표하였다.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연구 가치는 매우 크다고 보겠다. 김대환은 가족 회의를 열어 유물의 처리를 의논하였다. 세상에 널리 소문이 났으니 이 기회에 이용하여 기증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 다음날, 김대환은 미송리형 토기를 포함한 고구려 유물 71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겠다는 생각으로 박물관을 찾아갔다. 발걸음에 온갖 생각이 교차되었다. 할아버지께서 물려준 문화유산이 제대로 평가되어 많은 사람들이 보고 연구할 수 있다면 후손된 도리로써 조상에 대해 부끄럽지 않겠다고 생각 들었다. 그런데 박물관 관계자는 종이를 한 장 내밀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 양식에 뭐 이외에 몇 점이라 기제하고, 유물을 가져오면 됩니다.” 참으로 황당한 경우를 만났다. 평생을 마음 졸이며 소장한 문화재이며 나아가 세상에서 몇 십억 원은 호가한다고 하는 고미술품이다. 나라를 생각하여 큰 맘 먹고 기증한다고 해도 그들은 반가워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대수롭지 않은 물건으로 치부하며 귀찮아하는 표정이었다. 양식 한 장을 들고 필자를 찾아왔을 때, ‘기증하려면 모든 내용을 꼼꼼히 적어 사진까지 남겨 놓은 다음에 하세요.’라고 말해 주었다. 그 후에도 기증 의사를 다시 타진했더니, 국립중앙박물관은 무슨 영문인지 기증을 받지 않겠다고 하였다.
“유물 자체는 진품의 고조선 토기라는데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출처가 확실하지 않은데다 북한 지역에서 출토된 토기로 확인될 경우 북한과 말썽의 소지가 있어 기증을 거부하기로 했습니다.”
1998년 9월, 박영복(朴永福) 유물관리부장이 한 말이다. 황당하다 못해 웃음이 떠질 일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20여 만점의 유물 중에서 과연 출처가 확실한 것이 몇 점이나 되겠는가? 이를 두고 어떤 학자는 “박물관 운영을 공무원에게 맡겨서는 안되는 이유를 여실히 보여준 예이다. 유물을 탐내지 않는 박물관 관계자들이 한심스럽고, 관계 전문가들이 연구할 길마저 막아 버렸다,”라고 개탄하였다. 그런데 한국고고학회(회장 김종철)만은 ‘불법적으로 외국에서 흘러 들어왔을 지 모를 유물을 민족 문화의 상징 기관이 기증 받을 수는 없다. 중앙 박물관의 이번 결정이 국․ 공․ 사립․ 대학 박물관을 막론하고 당연한 듯 이뤄지는 불법 문화재의 구입 관행을 근절시키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출처를 따지지 않고 고미술품을 구입하는 관행이 문화재 도굴을 부추길 것을 염려해 한 말이었으나 본말이 전도된 억지 논리이다. 국내에 소장된 고미술품에 대해 한국고고학회는 과연 몇 점이나 그 출처와 내력을 밝혀 냈는가? 국보급 문화재라도 그 내력을 밝혀 우리 문화재를 더 소중히 생각할 기회를 주었더라면 필자가 굳이 이런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소장보다는 국가에서 보관할 때가 사람들에게 더 많은 연구와 감상의 기회를 준다는 공공성에 있다.
하지만 고미술품은 때에 따라 주인이 따로 있는 법이다. 스스로 자기 갈 곳을 결정했는지도 모르겠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기증 받길 거부했다는 뉴스가 나가자,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고려 대학교의 김정배 총장이었다. “저희 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해 주십시오,” 김영길은 생각했다. 외아들인 김대환도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자기 또한 경영 대학원 연구 과정을 수료한 고려 대학교이다. 결코 거부하기 어려운 인연이 중압감으로 몰려왔다. 라마다르네상스 호텔의 커피숍에서 만난 김영길과 김 총장은 그 자리에서 기중 날짜와 유물 내역을 정해 버렸다. 고조선 미송리형 토기 7점을 포함하여 고구려 금귀걸이 등 모두 65점이었다. 1998년 9월 30일, 고려 대학교는 보직 교수 100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김영길이 평생을 소장했던 귀한 문화유산을 감사한 마음으로 기증 받았다. 그 대가로 박물관 내에 기증자의 뜻을 살린 전시실을 별도로 꾸미기로 하였다. “이 문화재가 교육과 연구에 적극적으로 활용되길 바랍니다.” 짧은 인사말을 마친 김영길의 눈에 북쪽에 남겨 둔 부친에 대한 그리움이 스쳐 가는가 싶더니, 이윽고 눈물이 되어 떨어졌다 (참고: ①「고구려연구 제 5집」․고구려연구회․학연문화사, ②김대환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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