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백자매조죽문항아리(靑華白磁梅鳥竹文壺, 이화여대박물관 소장)
이 항아리는 높이가 27.8센티미터나 되는 당당한 크기이고, 조선 초기에 해당하는 15세기 백자의 기형과 문양을 잘 보여주는 항아리이다. 형태는 전체적으로 고려의 매병(梅甁)을 닮았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10.3센티미터의 주둥아리가 약간 좁으며, 또 떡 벌어졌다가 날씬하게 아래로 빠진 견부(肩部)와 동부(胴部) 밑으로 똬리 모양의 굽이 넓게 퍼져있어서 안전성과 균형미를 보태었다. 즉, 고려의 매병이 도시 미인의 가냘픈 어깨와 허리선을 본 딴 후 그 아래로 바람 난 여자의 엉덩이 선을 그렸다면, 이 백자 항아리는 갓 시집 온 종갓집 며느리가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서 종종걸음을 치는 상체 모습과 흡사해 보여 바라볼수록 마음이 듬직하다. 또 회화성 높은 그림의 하부에는 한 줄로 둥근 선을 그어 지선(地線)으로 삼았고, 땅에는 대나무와 더불어 매화나무가 꽃을 피웠고, 구연부에는 작은 원과 나선문대(螺線文帶)를 그려서 구름을 표현했다. 또 시원한 여백에 매화 가지와 참새를 생동감있게 그려 한국적 운치가 돋보이는데, 그림 전체의 뜻은 “봄을 맞이하여 기쁜 소식을 많이 받는다(喜報春先)”라는 기원이 담겨있다. 왜냐하면 매화와 대나무는 소나무와 함께 세한 삼우(歲寒三友)로써 봄소식을 먼저 알리는 식물이고, 참새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까치를 대신했기 때문이다. 본래는 매화꽃 가지에 까치가 앉아있어야 제격이나, ‘까치 작(鵲)’자와 ‘참새 작(雀)’자는 독음이 같고, 또 까치보다는 참새가 매화가지에 앉아있는 모습이 더 자연스러워 옛 그림에는 까치를 대신해 참새를 종종 그려 넣는다. 그 결과 이 항아리는 조선 초기의 화법인 몰골법(沒骨法)과 수지법(樹枝法)을 잘 보여주면서도 능숙한 화원이 그린 그림이 틀림없으니, 조선 초기의 회화 연구에 좋은 자료가 틀림없다.
60만환은 줘야 팝니다
한국 전쟁이 끝난 후, 1950년 중반의 어느 날이다.“장 선생, 얼마 전에 학교에서 구입한 청화백자매조죽문항아리(靑華白磁梅鳥竹文壺)가 있지요. 지난 며칠 동안에 여러 장의 투서(投書)가 들어왔어요.” 신촌에 자리잡은 이화여자대학교의 총장 공관. 어렵게 말을 꺼낸 것이 분명한 듯, 김 총장의 말에는 평소보다 더 아무런 수사가 없었다. 눈빛만큼은 남의 잘못을 껴안아 줄 만큼 자애로운 분이었으나, 핵심만을 담은 간결한 어조에는 의심이 차갑게 배어나왔다. 뜻하지 않은 말을 들은 장규서(蔣奎緖)씨이다. 깜짝 놀라 김 총장을 바라보더니, 곧 ‘이것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자, 한 줄기 전율이 등골을 타고 자르르 흘러들었다. ‘무슨 말이죠?’라는 말이 목에 걸렸으나 입은 이미 굳어 버려 입술만 파르라니 떨렸다. 장규서. 그는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하던 시절부터 이화여자대학교의 김활란(金活蘭) 총장을 도와 이대박물관의 전신인 필승각(必勝閣)을 설립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사람이고, 나아가 골동 전반에 걸친 폭넓은 안목으로 수집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오늘 날의 이대박물관은 김 총장의 굳은 결의와 용단이란 바탕 위에 참모였던 장규서의 피나는 노력이 보태져 이룩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무기명으로 쓰여 진 투서니까, 누가 했는지 모르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장 선생과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들이 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화 여대에 동양 최대의 박물관을 세우자면, 실로 다채롭고 폭넓은 문화재의 수집이 필요했다. 그래서 도자기와 민예품을 중심으로 수 천점을 수집하면서 김 총장의 손과 발이 되어 뛰었던 장규서이다. 만약 실수가 있었다면 관용과 사랑으로 감싸주겠다는 의지를 보이자, 장규서는 사건 전말에 대한 이해 뿐만이 아니라 그 물건에 대해서도 자신이 있어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러니까 얼마 전의 일이다. 회현동에서 살며 일제 때에 골동상을 운영했던 김종성(金鍾成)씨에게 하루는 골동 중개상인 정복남(鄭福男)씨가 찾아왔다.“김 선생님, 인사동에 조선 초기의 청화백자항아리가 나왔어요. 출토지는 서울 시내의 마포라고 전하며, 내가 보기엔 틀림없는 명품인데 모두 가짜라고 해요.”순간 김종성의 몸에 이상한 전율이 확 끼쳐왔다. 마치 대어를 낚기 전에 낚시꾼이 느끼는 직감같은 것이었다. 마포에 사는 일반 사람이 백자항아리를 팔러 나왔는데, 모두 가짜라 해서 팔지 못했고, 그래서 그의 주소를 적어났다는 것이다. 그의 말이 끝나자, 김종성은 마치 자력에 이끌린 사람처럼 정복남의 손을 잡고 자리를 일어섰다. 그 날은 마침 명절 전날이었다. 마포에 있는 일반 가정에 도착하자, 집 안은 제사 음식을 준비하느라 매우 어수선했다. 찾아온 용건을 말하자, 주인은 벽장에서 물건을 꺼내와 보자기를 풀었는데, 김종성은 대번에 큰 물건임을 알아차렸다. 그 속에는 이야기로도 들어보지 못한 천하의 명품이 수줍은 색시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형태와 그림 그리고 태깔을 살펴보던 김종성은 의심할 여지없이 눈이 시리도록 하얀 진품에 가슴이 떨려왔다. 냉정을 되찾은 김종성이 조심스럽게 가격을 물었다.“60만환은 주셔야 팝니다.” 인사동에서 가짜라는 소리를 들은 뒤였다. 기분이 몹시 상한 주인은 목에 힘을 준 채 한 치도 양보없다는 투로 못 박아 말했다. 속으로 가진 돈을 셈해보니, 대략 50만원은 족히 될 성 싶어 김종성은 되물었다.“물건은 틀림없는 진품입니다. 60만환 그 이상이라도 사고 싶으나, 가진 돈이 50만환밖에는 없습니다. 양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 때, 문 밖에서 “엄마, 우리 이제 부자가 됐어요.‘라며 감격에 겨운 듯 울음소리 비슷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긴장된 마음들도 한 순간에 풀어지며, 거래가 성사되었다. 김종성은 정복남에게 소개비 조로 5만환을 따로 챙겨주었다고 김종성 씨의 아들인 김태형(金泰亨,해동고도자연구소) 소장은 증언했다.
세상의 물건에는 때에 따라 주인이 따로 있는 법으로, 마포 부근의 어느 옛 무덤에서 출토되었을 청화백자항아리는 이런 비화와 함께 최초의 소장가에서 찬란한 모습으로 골동계에 나타났다. 하지만 세상의 눈은 그때까지는 밝지 못했다. 골동계에서는 김종성을 두고 가짜를 고가에 샀다며 수군댔다. 심지어 어떤 도자기 전문가는, “김 선생은 가짜를 진짜처럼 속여 팔았으니 재주가 좋은 분이다.”라며 죽을 때까지 가짜가 틀림없다며 놀린 사람도 있다. 또 기록이 잘못된 것도 전한다. 이 청화백자매조죽문항아리에 얽힌 비화는 이영섭(李英燮)씨가 『월간 문화재』에 기고했던 〈내가 걸어온 고미술계 30년〉이란 글을 참고했는데, 이 백자 항아리를 두고 쓴 아래의 글은 보물 제 644호로 지정된 청화백자송죽인물문호(靑華白磁松竹人物文壺, 이화여대 소장)에 대한 것으로 잘못되었다.
〈李朝磁器로는 最上級에 속하는 物件이다. 昨年에 國寶로 指定된 東國大學所藏品은 李朝初期白磁古靑華松竹紋銘入大壼와 꼭같은 形態이며, 東國大學校所藏品은 眞彩이며, 破損된 部分이 많으나 梨大所藏品은 回靑이며 格調가 높고 完全品이다.(문화재계비화 25회,P39)〉
중상모략에 시달리다
골동계는 예나 지금이나 눈이 밝은 사람이 승리하고, 한 점의 명품을 두고 인생 모두를 거는 것이 이쪽의 영원한 생리이다. 세상이 모두 가짜라고 입방아를 찧어도 김종성만큼은 손 안에 놓인 백자항아리를 두고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안목은 박물관 설립을 위해 불철주야로 뛰던 장규서에게 전달되었다. 당시에 장규서는 고려청자의 감식에 관해서는 사계의 권위자였고, 백자 감식도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다. 청화백자매조죽문호를 본 장규서는 확신에 친 얼굴로 간곡하게 말했다.“김 선생님, 아시다시피 저는 이화여대에서 박물관을 설립하며 전시할 작품을 찾고 있습니다. 이 명품을 학생들이 보고 배울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시오.” 김종성은 장규서의 애원 섞인 부탁을 듣고, 큰 고민없이 이 백자항아리를 80만환에 넘겨 현재까지 이화여대가 소장하게 되었다. 이 가격을 현재의 화폐가치로 환산키는 어렵지만, 참고로 현대에 이 물건을 거래한다면 80억원은 족히 넘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청화백자매조죽문항아리가 이화여대로 옮아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 물건을 두고 온갖 비방과 모략이 담긴 투서가 김활란 총장에게로 날아든 것이다. 예전에도 비슷한 사건이 많았으나, 이번만큼은 정도가 더욱 심해 김 총장도 신경이 몹시 쓰였다. 장규서와 김종성이 짜고 골동계에서도 팔리지 않는 가짜 물건을 싼 값에 사서 비싼 값으로 이화여대에 팔았다는 내용이다. 학교 예산을 들여 물건을 구입한 김 총장이다. 가짜로 판명되면 책임을 면할 수 없기에, 가짜라면 스스로 인수할 각오를 한 다음 구입 책임자였던 장규서에게 사실여부를 의논하는 것이었다.“장 선생은 그 사람들을 원망하지 마세요. 나는 장 선생을 믿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어디까지나 사람이지 그 이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누구도 실수할 때가 있고, 그것은 큰 허물이 아닙니다. 만약 그 물건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의심이 간다면 나 개인으로 그 물건을 맡지요. 공관 객실에 놓으면 어울릴 것 같아요.” 속마음을 모를 리 없는 장규서이다. 총장의 말은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히 들릴 만큼 그의 자심감은 확고하였다.“이조 초기의 물건임이 틀림없습니다. 드물게 보는 우수한 물건입니다. 적지않은 돈을 주고 샀고, 박물관에 진열하면 여러 사람이 볼 텐데, 자신없는 물건을 사들일 수가 있겠습니까? 일정 때에도 비슷한 물건이 출토된 적이 있는데, 많이 본 사람이 아니면 잘 모르지요. 만약 그 물건이…….”“장 선생은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하지 마세요. 이제 그 얘기로 모든 것이 충분합니다.”
말을 가로 막은 김 총장은 더 이상의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백자항아리는 곧 총장 공관으로 옮겨졌고, 총장이 개인적으로 맡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는 채 세월만이 흘러갔다. 여기서 사향노루는 아무리 산 속 깊이 숨어도 냄새가 사람을 부르듯이, 이 청화백자매조죽문항아리는 우연찮은 계기로 세상에 그 가치가 드러났다. 어느 해인가 이화여대는 창립을 축하하기 위해 파티를 열었는데, 여기 손님으로 장택상(張澤相)씨가 초대되었다. 장택상은 수도경찰청장을 지낸 분으로 백자 감식에 있어서는 첫 손가락에 꼽는 전문가였다. 총장 공관의 객실에 들어선 장택상은 무엇에 홀린 듯 객실에 놓여있던 청화백자매조죽문호쪽으로 걸어 가 한참 동안이나 정신없이 들여다보고는 김 총장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김 총장님, 이 물건은 고려상감자기에도 비교가 안되는 드물게 보는 명품입니다.” 조선 백자에 대한 감식안으론 당대 최고라는 사람의 절찬(絶讚)을 받자, 김 총장은 그 동안 가슴에 뭉쳐있던 응어리가 일순간에 풀리면서 기쁘고 떳떳해졌다. 파티가 있던 다음 날이다. 김 총장은 장규서를 불러 파티 장에서 장택상이 백자항아리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얘기를 하면서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다. “그동안 그 일 때문에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겠어요.”
김 총장은 마치 지난날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듯이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냈다. 그러자 냉정함을 잃지 않던 장규서도 그 말에는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뜨거워짐을 느꼈다. 사필규정(事必歸正)이라 하였다. 가짜를 비싸게 샀다고 총장에게 친전까지 보내며 투서가 쌓였던 청화백자매조죽문호이었지만, 사심없던 밝은 눈과 사람에 대한 믿음이 결국은 의심의 응어리조차 봄날의 눈처럼 말끔히 녹여버린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드디어 청화백자매조죽문호는 그 존재 가치를 세상에 빛낼 수 있었다.
(고미슬문화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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