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제희의 풍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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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과 작가의 터, 평창동 - 역사적 고찰, 지리적 특징

평창동의 역사적 고찰

     [평창동의 지명 유래]
평창동은 조선 시대에 선혜청(宣惠廳)의 평창(平倉)이 있었으므로 해서 생긴 지명이다. 고종 때 편찬된 『육전조례』에, 평창동이 한성부 상평방(常平坊)의 선혜청에 속하고, 그후 일제강점기에는 경성부제 실시에 따라 평창동은 율목동(栗木洞), 월계동(月桂洞)과 함께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평창리라 불리웠다.

     광복 후 평창리는 서울의 서대문구에 편입되고, 동년 8월 14일 서대문구에 은평출장소를 설치하여 관할하에 두다가 1950년 3월 15일 평창리는 평창동으로 바뀌었다. 1955년 4월 18일 행정동제가 실시될 때 구기동과 평창도의 첫글자를 따서 구평동(舊平洞)으로 하였다. 1970년 5월 18일 평창동사무소가 설치되어 구기동과 평창동을 관할하고 있으며 1975년 10월 1일에는 구관할구역의 변경이 있을 때 서대문구에서 종로구 평창동으로 변경되어 현재에 이른다.

     평창동에는 율목동(栗木洞), 신창(新倉), 월계동(月溪洞), 평창굴장안의 토착마을이 있다. 율목동은 밤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 밤의 수확이 많은 동이므로 밤나무골이라 했던 것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또한 평창동은 센창이라하며 156번지 일대를 일컫고, 평창굴은 330번지 일대인데 총융청의 평창이 있어서 붙여졌다. 당초에는 한양굴이라 하였다. 또 월계동은 월계정(月桂亭)이 있었기 때문에 동네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하고, 월계수로 만든 정자가 있어 월계동(月桂洞)이라 하던 것이 월계동(月溪洞)으로 바뀌어졌다. 186 ∼ 187번지 일대는 장안이라하여 평창동 중에서도 가장 큰 토착부락이었다.

     [평창동의 행정적 특징]
     평창동은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동으로, 면적은 8.87㎢이고, 인구는 2,000년 현재 1만 9331명이다. 전체 면적의 65% 이상이 개발제한구역이다. 북악터널과 구기터널이 있으며, 세검정길과 진흥로가 터널과 연결된다. 북한산 기슭에는 고급주택이 많이 있고, 535번지에 조계종 해원사가 있고 541-1번지에는 보현산 신각이 있다. 보현산 신각에 오르는 길에 역사 소설가 월탄 박종화가 살았던 조수루(釣水樓)가 있다.

     평창동은 북한산국립공원과 접해 있어 많은 고적이 있다. 승가사(僧伽寺), 문수암(文殊庵) 등의 사찰과 비봉에는 진흥왕순수비유지(眞興王巡狩碑遺址:사적 228)가 있고, 비봉에서 홍지문에 이르는 탕춘대성(蕩春臺城)이 구기동과 홍은동, 불광동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진흥왕순수비는 손상을 막기 위해 1972년에 경복궁으로 이전하고, 그 자리에는 모조비를 세워 놓았다.


평창동의 지리적 특징

     [평창동의 지형]
     평창동의 지형은 북한산 줄기가 뻗어 내린 관계로 평지보다는 계곡과 산이 많다. 북한산 남쪽 기슭의 북악터널 인근에 있으며, 동쪽은 성북구 정릉동, 서쪽으로 구기동, 신영동 남쪽은 부암동·삼청동, 북쪽은 경기도 고양시와 접해 있다. 동으로 북쪽지방은 표고 200 ~ 714m의 비교적 높은 산지이며 동쪽과 남쪽 사이도 급경사의 산지로 형성되어 있다.

     [평창동의 골짜기]
     삼각산 남쪽 기슭에 해당되는 평창동 쪽에는 많은 골짜기가 있어 한 때는 사이비 종교의 신전(神殿)으로 각광을 받았다. 삼각산 산신령의 영험함을 그대로 몸에 받았다는 사이비 교주들이 골짜기 곳곳마다 토굴을 파거나 암자를 지어서 주야를 가리지 않고 북과 꽹과리 소리를 내었고 바위마다 촛농이 두껍게 녹아 내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 1957년 불교정화론과 1971년 북악터널이 개통되면서 암자의 단속해 없어졌다.

     [주요 골짜기]
     - 네바미: 여우굴 서남쪽에 논배미 넷이 있는 골짜기
     - 논 골: 네바미 서남쪽 너머에 있는 골짜기
     - 농바위골: 병바위골 밑의 골짜기(바위모습이 농처럼 생겨서 붙여졌다.)
     - 메주막굴: 평창 뒤 메주를 쑤는 막(幕)이 있는 골짜기
     - 배바윗굴: 정릉으로 넘어가는 골짜기로 배바위가 있다하여 붙여졌는데 북악터널 바로 위가 된다.
     - 단굴 : 큰굴 동남쪽 골짜기로 여자의 화상을 모시고 소찬으로 치성을 올리는 당이 있었는데 큰굴과 합쳐 보현산신각(普賢山神閣)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 여우굴 : 효지당굴 서쪽 너머에 여우가 사는 굴이 있는 골짜기
     - 우물골 : 두만잇골 너머 버덩을 지나서 우물이 있는 골짜기
     - 호랭이굴 : 안장 바윗굴 너머에는 호랑이굴이 있는 골짜기

     [평창동의 고개·바위]
     형제봉
     보현봉에서 서남쪽의 산 능선을 따라 평창동으로 이어지는 곳에는 크고 작은 산 봉우리 2개가 연이어 있는에 이를 형제봉이라 한다. 조금 높게 우뚝 솟은 봉우리가 형, 그보다 낮은 것은 아우봉우리이다. 이들 봉우리에 얽힌 전설이 다음과 같이 전해온다.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다는 말이 있자, 고려 조에 역모의 누명을 쓰고 구족(九族)의 멸화를 당하여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채 숨어 살던 형제가 그 소문을 들었다.

     새나라의 새 왕에게 멸문지화(滅門之禍)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충성을 다할 량으로 부지런히 남행하였다. 아직도 드러내어 사람들과 접촉할 수 없는지라 산길만을 택하여 한양으로 오던 중 보현동 근처에서 호랑이를 만났다. 두 형제는 용감히 싸웠으나 피투성이 된 채 탈진하여 형제봉까지 오자 동생이 먼저 쓰러지면서 자신은 이왕 죽은 몸이니 형은 반드시 한양까지 가서 가문의 영화를 다시 찾으라 하며 혼자 갈 것을 유언하며 숨을 거두었다.

     동생을 묻은 형은 한양으로 향하기 위해 몇 걸음 떼어놓기도 전에 남편 호랑이의 복수를 하려는 암호랑이에 의해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후 두 봉우리가 생겨났는데 북쪽의 약간 낮은 봉우리는 남쪽의 높은 봉우리를 향해 손을 내젖는 형태를 하고 남쪽의 높은 봉우리는 뒤돌아보는 형태를 하였는데 사람들이 형제봉이라 하였다.

     소단굴과 큰굴
     물텃굴 너머에는 남자의 화상을 모시고 치성을 올리는 당이 있는 골짜기라 하여 큰굴이라 하였고 큰굴 동남쪽의 골짜기는 소단굴이라 하였다. 소단굴과 큰굴을 부부골짜기라고도 하는데 보현산신각 아래 여산신각이 여성신을 모신 것이라면 보현산신각은 남성신을 모신 것이다.

     소단굴과 큰굴에게 바치는 치성이 같아야만 산사태가 나지 않으며 만약 어느 한쪽이라도 차이가 날 경우 자연재해가 생긴다 하였다. 소단굴에 지나친 치성이 가면 음기(陰氣)가 강해서 산에 큰물이 지고, 반대로 큰굴에 치성이 강하면 산불이 자주 난다고 한다.

     명성왕후 친위대 일본 교관에게 훈련받던 곳
     명성황후는 평창에다 귀족 양반 자제들을 뽑아 신식 훈련을 시작했는데, 민영의를 훈련 당상으로 삼고 일본에서 호리모토라는 중위를 불러다가 교관을 삼았다. 선택받은 이 양반 군대를 종전 군대와 구별하는 뜻에서 별기군이라 호칭했고, 아래위에 초록색 군복을 입혔기 때문에 초록 군대라 불렀다.

     평창 훈련소의 개소식이 있던 날이다. 호리모토가 입구에 서서 들어오는 하객들에게 빗자루에 석탄 산수를 묻혀 뿌려댔다. 손님으로 온 김노안이 불쾌하며 따지자, 염병이 유행하여 세균을 죽이려는 행위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민영의가 가마를 타고 들어오자 호리모토는 가마를 수행하였다.

     그러자 김노안은 " 이 쥐새끼 같은 호리모토란 놈아!. 소독하는 것은 고마운 일이나 그렇다면 당상이 입문할 때는 왜 소독을 하지 않았느냐. 병균이 벼슬을 보고 붙고 안 붙고 한다는 말이냐"하고 성내어 호통을 쳤다. 옹졸했던 호리모토는 "당상의 비단옷은 깨끗하여 세균이 붙지 않는다"고 하자 김노안이 "일본이 개화됐다더니 병균도 개화되어 비단옷과 베옷을 알아보는구려"하여 웃음판을 자아내게 했던 것이다.

     호리모토라는 일본 교관이 어찌나 잔인 무도했던 지 어느 날, 자기 몫으로 선반에 얹어 둔 쇠고기 한근을 고양이가 물어갔던 것 같다. 이 고양이를 잡아 생도들 앞에서 재판을 하고 다섯토막을 내는 오살형을 선고, 직접 날카로운 칼을 들고 형을 집행한 다음 돌을 떠들고 묻어 버렸던 것이다.

     그 잔인성으로 생도들에게 위압을 주기 위한 방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후 초록 군대에 비해 혹심한 차별 대우를 받고 있는 구식 군대의 원망이 누적되어, 임오군란이 일어났음은 알려진 사실이다. 군란 중 호리모토는 난민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여 도감의 바윗돌 밑에 묻혔으니 그가 죽인 고향이의 업보를 그대로 되받은 것이라 하여 입에 올랐던 것이다. 희극이 벌어졌던 이 평창은 한국개화사의 한 무대였다 할 수 있다.

[사진 : 평창동의 상류층 주택 전경(주간동아에서)]

예와 덕을 숭상한 땅, 예산 - 수덕사와 풍수, 예산의 개발과 보호

예술과 작가의 터, 평창동 - 평창동의 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