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배 일자를 통보받자, 나는 소개서를 써가지고 책과 함께 인사과장을 찾아갔다. 삼성생명에서 추진하는 실버타운사업이나 그것이 어려우면 문화나 홍보 파트에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보험회사는 조직이 간단합니다. 영업을 하느냐 아니면 기획 관리를 하느냐 하는 겁니다. 보험을 모르 시니 상품 기획이나 관리는 할 수 없잖아요." 맞는 말이다. 보험의 '보'자도 모르고 급호만 높아서 전배를 온 것이다. 사령장을 받고보니 예상했던 대로 법인을 상대로 단체 보험을 파는 법인영업팀의 담당 과장이었다. 배치를 받고나서 새 상사에게 인사를 갔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전배를 온 고 과장입니다.' S팀장은 기대감이 없는 눈빛으로 나를 맞이하였다.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실 때이다. 나는 회사생활 13년 만에 최대의 수모스런 말을 들었다. 

 "당신 말이야…."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다음의 말들이 들리지 않았다. 아직까지 회사 내에서 '당신', '너'라는 말을 들어보지 않았다. 그러나 보험회사는 문화가 특수하였다. 상하 관계가 엄격한 곳이라 반말이 여반장이 었다. 

나의 햇병아리 보험 영업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생명보험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었 고, 설계사들이 치르는 시험도 약식으로 보았다. 용어가 까다로웠으나 72점을 받아 그럭저럭 합격하 였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고 있을 때, KBS 제 1라디오에서 전화가 왔다. "KBS전국연결이라는 프로입니다. 선현에 대한 이야기와 주변 문화 유적을 소개하는 프로를 진행해 주 십시오. 1년간 방송될 것입니다." 새 직장에서 어떻게 생각할까 먼저 걱정되었다. 며칠 전에 대구 MBC TV에 출연할 때도 어렵게 허락 을 받아 낸 것이 마음에 걸렸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세요.

  나 또한 모르는 일로 해야 합니다." 허락 아닌 허락을 받은 다음에 방송에 출연하였다. 금요일마다 선현의 묘를 중심으로 그 분의 일화와 주변의 문화 유적을 소개하는 프로였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역사 연구가며 문화재 전문가인 고제희 씨를 모셨습니다." 프로는 진행하는 H아나운서와 K성우가 나를 소개하는 짤막한 멘트이다. 나도 그 말을 무척 좋아한다. 보험의 세계로 들어선 지 약 2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기존 거래처와의 계약 사항을 정리하 면서 보험 업무를 익혔으나, 3달째로 접어들자 실적을 챙기기 시작하였다. 소위 밥벌이를 해 오라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후배를 따라다니며 보혐영업에 필요한 실전경험을 쌓았다. 내가 파는 상품은 '종업원퇴직보험'이다. 이 상품은 기업이 절세를 목적으로 주로 결산기에 가입하는 보험이다. IMF 상 황이라 이익이 없으니 새로운 가입보다는 해약이 많았다. 

 경험이 좀 쌓이자, 혼자서 차를 몰고 나가 전화를 걸었다. "법인영업과장입니다. 기업 대출과 종퇴보험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한번 방문하여 상담을 하고 싶습니 다." "우리는 그런 것 필요 없어요. 그리고 그런 전화가 너무 많이와 귀찮아 죽겠어요. 끊어요."
 "회사가 어렵습니다. 월급도 못 주는데 퇴직금을 걱정할 형편이 아닙니다. 12월 결산이니 그때 가서나 봅시다." 몇 달이 지나가도 실적이 전혀 없는 소위 '무적(無績)'의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런데 기존에 보험 영업 을 했던 동료들은 꾸준히 신계약을 성사시켰다. 그들의 비법을 배울거라고 열심히 쫓아다녔지만 신통 한 방법은 아니었다. 결국 보험은 씨앗을 많이 뿌려 두는 게 중요하며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한 일임 을 깨달았다. 

 "고 과장, 이번 달에도 실적이 없네. 급호도 높은 사람이 실적이 없으면 큰 일 나." 괴로웠다. 그 상품은 이미 오랫동안 판매된 상품이라 새로운 거래처를 발굴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다. 하루는 차를 몰고 안산으로 향했다. 

 그곳은 반월공단과 시화공단이 있어 제법 큰 보험 상권 이다. 몇 군데에 들려 설명을 했더니 다음에 필요하면 연락을 주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연락을 주겠다 고 하고 실제로 연락을 해 주는 경우는 보험 사전에 없다. 거절의 정중한 표현으로 알면 된다. 안산 지역을 꾸준하게 집중 공략하였다. 조회를 마친 뒤 안산에 도착하면 점심때가 되고, 귀사하면 저 녁이었다. 하루에 3∼4개의 기업체를 방문했지만, 모두 어렵고 힘들다는 얘기뿐이다. 이미 다른 보험 사에 가입했다며 말도 못 꺼내게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중대한 문제가 나로부터 발생하기 시작했다. 보험회사로 직장을 옮겼다며 인사를 갔을 때, '세 상이 어려우니 꾹 참고 열심히 일하라'고 충고하던 분들이 차츰 나를 피했다. 이유를 생각하니 한편 으로 이해가 되었다. 나를 위한다면 주위 사람을 소개시켜 주어야 하는데 그럴 형편이 안되는 것이다. 

소개를 받아서 1백 만원 짜리 두 건을 계약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일 때문에 두고두고 질책만 받았 다. "아니, 봉급이 얼마야. 백 만원이 몇 개가 모여야 1억원이 되나?" 보험회사는 계획만 달성해도 상을 주는 제조회사와는 달리 5백%를 초과 달성해도 순위가 꼴찌면 꼴 찌이다. 그것도 매일 아침마다 성적을 체크하여 꼴찌를 가린다. 하루는 팀장이 의미 신장한 말을 하였 다. "고 과장이 무적인 이유가 뭔지 알아?" "보험에 죽으라고 매달리지 않기 때문이야. 보험 영업을 하려면 자면서도 활동하는 꿈을 꾸어야 해. 그런데 고 과장의 머리 속에는 딴 생각으로 차 있어. 안 그래?" 

귀신같이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본 한 마디이다. 그랬다. 나는 보험을 한낱 밥벌이로 생각하였다. 더 욱 나를 괴롭힌 것은 하루라는 시간의 가치였다. 하루 종일 보험 활동을 하지만 막상 결과를 정리하 면 맹탕에 또 맹탕이었다. 그저 허송세월을 보낸 것에 불과하다. 달마다 마감을 해야 하는데 그것 또 한 무적이었다. 심한 회의감이 몰려왔다. 비록 돈으로 환산할 수는 없지만 내가 좋아하는 연구를 하루 종일 하는 것과 실적도 없이 보험 활동을 하는 것과 서로 비교해 보았다. 보험 영업은 내게 빵을 주 지만 성과는 없고, 글은 성과는 주지만 돈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갈등이 심해 술을 입에 자주 대었다. 주위에서도 어떤 결정을 부추겼다. "보험은 고 과장하고 맞지 않아요." 언제인지 모르지만 내 마음은 이미 퇴사를 결정하고 있었다. 생계를 지탱할 직업을 갖기가 힘들다는 현실 때문에 문제를 덮어둔 것에 불과하다. 


'7월이 차장으로 진급할 케이스야. 그런 꿈은 버려야 하겠지. 나는 생명을 위해 아무런 업적이 없고 또 영업실적도 없어. 다른 회사에서 열심히 일했다 해도 그건 그쪽의 문제이지. 내 마음은 이미 보험 보다는 딴 곳에 있어. 그리고 내년에는 연봉제가 실시된다지. 지금의 성적으로 보아 많이도 깎일 거 야. 아니 지금의 상태라면 올해를 버티기도 어려워. 생명에 입사해 젊음을 몽땅 바친 사람도 줄줄이 퇴사를 하잖아. 나같은 철새를 누가 보호해 주겠어.


퇴사는 이미 기정 사실로 마음에 자리잡았다. 그런데 업적도 없이 퇴사한다면 그건 내 자신이 너무 나약해보일 것 같았다. 또 전배를 오는 후배에게도 업적 없이 물러난다면 선배의 도리가 아니었다. 스 스로를 위해서도 꼭 회사가 만족할 만한 계약을 성사시킨 뒤에 당당하게 퇴사하자고 다짐했다. 비록 쫓겨나는 일이 있어도 '그 사람 정말 열심히 했어.'라는 말을 들어야 나갈 수 있었다. 그 길이 삼성에 입사해 14년을 근무한 나 자신에 대한 의무며 멋진 마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랄만한 계약을 성사시키자는 결심이 나를 영업으로 몰아붙였다. 국회도서관을 찾 아가 97년 6월 결산 법인의 결산서를 카피했다. 

100여 장 중에서 이익과 계약 여부를 조사하니 10여 개 업체가 다시 추려졌다. 무작정 찾아가 매달리니, 한 업체가 호감을 표시하였다. 그 회사는 경영 자 문이 전문인데 IMF 시대에 들어 더욱 영업이 잘 된다고 자랑하였다. 나는 R대리에게 책을 선물하며 보험 가입을 부탁하였다. 보험가액이 5억 원 정도는 예상되었다. 현금 5억원이면 당당하게 한 건했다 며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회사는 S생명과 이미 거래하고 있는데, S생명의 직원이 2년을 넘게 방문하여 인간적인 믿음이 싹 텄다고 하였다. 회사에 영업자원으로 올렸더니 모두들 잘 해보라고 격 려해 주었다. 6월로 접어들자, 나는 때에 맞추어 그 회사를 자주 방문했다. 그런데 기존 거래처와 인 간적인 정이 두터워 나와의 보험금이 2억원 정도로 줄고, 결국에는 6천 만원 좀 넘는 금액으로 계약 되었다. 98년 6월 30일의 일이다. 그날 저녁이다. 나는 팀장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부장님, 도와주십시오. 퇴사했으면 합니다." 팀장은 무덤덤하게 바라보았다. 예전에 부하가 퇴사를 한다면 집까지 찾아가 말리던 시절이 있었다. 격세지감이 들었다. "왜? 먹고 살 것은?" 퇴사는 정말 쉬운 절차를 거치더니, 7월 2일에 사표가 수리되었다. 이것이 나의 네 번째 퇴사며, 어렵 게 찾아 가꾼 나의 인생을 위한 퇴사였다. 그리고 27살부터 40살때까지 내 청춘을 묻은 삼성과의 이 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