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형문화재의 지원 사업은 서서히 체계가 잡혀갔다. 
경쟁력 있는 전통기법과 소재를 현대 디자인과 접목시켜서 한국 고유의 세계적 명품을 개발하자는 방침에 박차를 가하며 추진하였다.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대로 사업을 수행할 만한 예산도 배정 받았다. 또 97년 5월은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달로 기억된다. 

 H갤러리에서 《H미술관 소장 금속유물특별전》 이 열린 것이다. 이 전시회는 『실록소설 문화재 비화』의 주인공인 김동현 옹이 필생을 두고 수집한 유물을 한 자리에 선보이는 뜻깊은 전시로 국보가 5점, 보물이 5점이나 출품되었다. 김동현 옹은 간장과 새우젓만 찍어 밥을 먹으면서 일제의 수탈과 전쟁통에서 민족문화재를 지켜낸 선 각자이고, 금속유물 300여 점을 모두 H미술관에 양도하였다. 그런데 한 사람의 수집품을 한 곳에 모 아 전시하고 도록까지 발간하기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기증이 아닌 돈을 받고서 양도했으니 엄 연히 주인이 바뀐 것이다. 

 미술관의 입장을 볼 때 전 소장자를 감추고 싶은 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H미술관은 〈민족문화재를 지켜 낸 위대한 선각자〉로 K씨를 지목하고 거금을 들여 전시회를 열어 주었다. 아무튼 민족문화재를 사명감으로 지켜낸 분의 수집품을 한곳에 모아 전 시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내가 책으로 김동현 옹을 소개하지 않았다면 그분은 지금처럼 선각자로 우뚝 서지 못한 채 골동상으로 이름이 묻혔을 것이다. 
 더군다나 수집품을 한 곳에 모아 전시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문화재 비화』를 통해 문화재에 일생을 바친 그 분의 애국심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김동현 옹이 세상에 알려진 것이 좋았다. 그리고 나의 글이 세상을 이롭게 했다는 뿌듯함도 컸 다. 비록 징계는 받았지만 회사도 나의 공로를 은근히 인정한 셈이 되는 것이다. 전시회가 열리던 날, 나는 김동현 씨 부부와 함께 감격스런 기념 촬영을 하였고, 고맙다는 인사도 정중하게 받았다. 그날, 행복에 겨운 두 노인이 감사의 인사를 많은 대중 앞에서 할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세상은 자기가 노력하는 만큼 아름다워질 수 있다.' 그렇게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서늘한 가을이 되자, 신문에는 연일 실업자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나와 는 다른 세상의 기사로 여겼다. 그런 와중에 IMF라는 험난한 파도가 이 나라를 덮쳤다. 어제까지도 탄탄할 것 같은 기업이 줄지어 도산하고 미술관도 어렵다는 말이 무성하였다. 97년 10월의 일이다. 98년의 사업 계획을 수립하면서 내가 담당한 사업도 위기에 봉착하였다. 경영 여건이 어려우니 사업을 축소하거나 지연시켜야 한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떠돌았다. 난감해진 나는 무 형문화재의 지원이 시급하고 또 중요하다는 사실을 열심히 설명하며 다녔다. 다행스럽게도 장인과 디 자이너들도 호흡을 잘 맞추어 주었다. 회사 사정으로 무형문화재 사업이 불투명해지자,
  나는 하루빨리 명품을 보여주어 꼭 성공할 수 있다 는 확신을 경영진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디자이너들에게 작업을 독려했다. 꼭 성공해야 한다는 중압감만이 머리 속을 가득 메웠다. 그러던 97년 12월의 어느 날이었다. 

 이사가 나를 회의실로 불러 들어갔다. 업무 지시에 대비해 손에 는 메모장과 펜이 들려 있었다. 그런데 평소에 피우지 않던 담배를 달라는데 얼굴에는 곤욕스런 표정 이 짙었다. 
 
 본능적으로 머리카락이 삐죽 곤두섰다. 그 분은 한동안 담배만 피울 뿐 말이 없었다. "고 과장, 사업은 어떻게 추진되고 있어?" 나는 그때까지도 그 질문의 진의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꼭 성공할 것이니 지켜봐 달라는 말과 함께 사업추진내용을 간략히 설명했다. 그런데 그 분이 나를 부른 이유가 사업을 챙기기 위한 것이 아님이 점점 분명해졌다. 불안감이 몰려왔다. "고 과장, 회사가 무척 어렵다는 것을 알지. 

 그래서 말인데, 이번 기회에 다른 회사로 가면 안될까. 삼 성 내에서 원하는 회사가 있으면 어디든지 보내 줄 수 있어." 나는 앞이 캄캄해졌다. 삼성문화재단 내의 간부 중에서 내가 1등으로 정리되는 셈이다. 꿈에도 상상치 못한 일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현실이 되었다. 
"이사님, 저는 일이 재미있고 또 잘할 자신도 있습니다. 회사가 어렵다면 고통까지 분담하면서 일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눈을 똑바로 치켜뜨고 대답하자, 이사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알지. 그런데 이미 비서실에 통보가 된 상태라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어느 회사로 가고 싶어"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 지 판단도 서기전에 나는 집요하게 '어느 회사'를 강요받고 있었다. 내 삶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 또 이런 상황에서 맞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그 모두를 판단하기 훨씬 이전부터 나는 이미 회사로부터 정리된 사람이었다. 머리 속에 재빨리 삼성항공과 삼성전자가 떠올랐다. 하지만 다시 원가관리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꽁꽁 얼어붙는 듯 했다. '어떻게 해서 벗어났는데 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단 말인가. 
 그럴 수는 없어.'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래서는 안된다는 생각뿐이었다. "고 과장, 나도 알아. 고 과장이 업무에 얼마나 열심이고 또 주위 사람들로부터 신임을 받고 있는지. 그런데 회사가 어려우니 어쩌겠어?" "저는 이곳을 떠나기 싫습니다. 그런데 꼭 떠나야 한다면 삼성생명으로 보내 주세요." 면담은 그렇게 끝났다. 자리에 돌아오자 다리가 후들거렸다. 
 
 가깝게 지내는 동료에게 면담한 내용을 털어놓았다. 모두 깜짝 놀라며 말도 안되는 처사라고 했다. 하지만 어떤 사람도 이미 내려진 결정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것이 조직의 생리임은 알지만 언제나 차갑다는 느낌을 치울 수 없다. 밥을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고 잠을 자도 잔 것 같지가 않았다. 함께 명품개발을 추진했던 디자이너 들과 자문 위원들이 구명 운동을 벌렸다. "고 과장을 다른 곳으로 보내면 이 사업은 끝장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회사로 찾아가 결정을 철회하도 록 합시다." 그 분들은 실제로 행동으로 옮겼다. 눈물나도록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회사의 결정 앞에서는 어림도 없었다. 나 역시 모든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송별회가 있었으나 모래 씹는 기분이었고, 술을 먹어도 취하지 않았다. 상념들만 머리 속에서 뒤엉키 고 있었다. 떠나고 싶지 않았기에 할 말도 없었다. 묵묵히 그동안 추진했던 사업과 관련된 자료와 파 일을 정리해 업무인수인계를 하였다. 인사 부서에서 몇 번을 부르더니 전배 날짜까지 잡혔다. 전배된다는 말을 아내에게 했더니 해고당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여기는 눈치였다. 세상에서 나를 변호하고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많지가 않았다. 그저 해고당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여기라는 투였다. 이것이 나의 세 번째 퇴사로, IMF라는 괴물이 나타나자마자 가장 먼저 내가 제물로 올려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