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전자에서 목마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고마운 분을 만날 수 있었다.
누(樓)와 정자(亭子)에 대한 책을 구하려 서점에 들렸다가 '문학의 산실-누정을 찾아서'라는 책을 보고, 그 저자 중의 한 분인 L씨를 만난 것이다. 그 분은 한글학회 이사로 역사 인물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정자에 관심이 있다고 했더니, 함께 답사를 다니자고 하였다. 그 후로 틈만 나면 차를 몰고 수도권의 누정(樓亭)과 역사 인물의 묘를 찾아다녔다. 답사를 다니며 그 분에게서 듣는 이야기는 직장 내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는 싱싱한 것들이 전부였 다.

 역사에 새로운 눈이 떠지고 사는 것이 신이 났다. 지금에 와 생각하면 그게 끼가 아닌가 싶다. 무 궤도의 삶을 맴돌다 본능에 이끌려 찾아간 제자리가 아닐까! 그건 얼음판을 이리 저리 돌아다니던 팽 이가 어느 순간 한 자리에 자리를 잡고는 우뚝하니 쉼없이 돌아가는 그런 정적인 미학(美學)인지도 모 른다. 수원을 답사할 때는 지지대 고개를 비롯하여 융·건릉, 용주사, 수원성, 방화수류정을 돌아보았다. 답사 를 마치고 돌아오면 문화 유적에 대하여 꼬박꼬박 정리하였다. 물론 누가 시킨 일도 아니였다. 답사기 가 제법 두툼해지자 나는 아내에게 자랑삼아 보여주었다. 답사가 거듭되자, 나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누정은 역사 인물이 마음을 쉬었던 곳이라 건물을 지 은 분만이 아니라 그곳을 다녀갔던 많은 누정시인도 함께 알아야 한다는 또 다른 갈증이었다. 정자에 대한 답사기를 쓰려면 자연히 인물 이야기가 나오고, 문집을 참고하여 역사 인물의 일생을 글로 옮겼 다. 그런데 문집만으론 그 분이 세상을 살고 또 정자를 다녀간 사람이라는 느낌이 오지 않았다.
 혹시 책이나 이야기 속에만 나오는 전설적인 인물은 아닐까하는 거리감이 느껴졌다. 정자를 다녀가며 남긴 시에는 분명히 인생의 애환이 여과없이 전해진다. 하지만 실체가 없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묘를 직접 찾아보는 일이었다. 무덤은 살아 생전 그 사람의 흔적을 후세에 각인시키는 최소한의 유품이다.

  당대를 풍미했던 정치가 와 천하를 호령했던 장군들에서부터 뭇 사내의 애간장을 태웠던 시기(詩妓)에 이르기까지, 우리와 똑 같이 삶의 애증에 몸부림치며 살다 간 이웃이다. 그후로 주말마다 전국에 있는 역사인물의 묘를 기행 하였고, 평일에는 역시 답사를 기록으로 남겼다. H미술관은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가 100여점에 이르는 동양 최대의 사립미술관이다. 선사고분 유물, 청자, 백자, 분청사기, 고서화, 불상을 비롯한 불구(佛具), 민속공예품, 목기 등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 숨을 쉬고, 물을 마신 선조의 문화유산이 그득히 모여 있다. 모두가 자자손손 물려줄 위대한 예 술혼이며, '민족의 영광'들이다. 고미술품을 직접 만지며 관리하는 직책이 주어지자, 퇴근이 싫어졌다. 그만큼 기쁨을 주는 것이 세상 어디에도 없으니 퇴근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부서에 비치된 자료를 닥치는 대로 읽었다. 어려운 문구 가 있으면 찾고 메모하는 습관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래도 의문이 있으면 전시된 고미술품이나 수 장고에 있는 유물을 직접 확인하고 다녔다. 나날이 문화재에 대한 지식이 쌓여 갔다. 일 년의 세월이 쏜살같이 지나가자, 고문화에 대한 지식의 폭도 처음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넓고 깊어졌다. 역사 인물 의 묘와 누정에 대한 답사 또한 나의 삶을 풍성하게 살찌웠다. 우리만큼 우리의 문화재에 관심을 두지 않거나 모르는 민족도 드물 것이다. 『한국인에게 문화는 있 는가』란 책의 저자, 최 교수는 다음과 같은 경험담을 들려준다.

   "유럽 대륙에서 종교의 박해를 피해 최초로 미국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타고 간 배의 이름이 뭐죠?" 그러면 학생들은 큰소리로 대답한다. "메이플라워호죠." "좋아요. 그럼 임진왜란 때 일본 수군과 상대했던 우리나라 수군의 주력함이 뭐죠?" 그러자 강의실은 곧 조용해졌다. 물론 거북선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답은 '판옥선(板屋 船)으로 배의 지붕을 판으로 덮어 적의 공격을 막는 당시로는 최첨단의 군함이었다. 상식에 속하는 것인데, 한국의 학생은 이상하게도 그다지 연관이 없는 서양배 이름은 잘 알면서 정작 우리 배의 이름은 모른다. H미술관에는 년 20여 만명의 사람들이 찾아와 전시된 고미술품을 관람을 한다. 하지만 그들의 대부분도 고미술품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충분히 감상하지 않은 채 일변 스쳐지 나간다. 나는 그것이 안타까웠다. 한점 한점에는 선조의 예술 혼과 삶이 절절이 배어있고, 또 그것을 목숨으로 지켜낸 위대한 선각들의 사랑이 전해진다. "이거 진짜요, 가짜요? 얼마지요? 어디서 도굴했어요?" 관람객들의 관심사가 대개 이러했다. 국보 제118호인 '고구려금동반가사유상'은 일제 때에는 기와집 250채 값에 달했던 물건이지만 전 소장가 김동현 옹은 일본인의 협박에도 팔지 않고 50년간이나 지 켜낸 불상이다. 그런 애정이 배여있는 불상이지만 녹이 슬고 팔이 떨어져 나갔다고 사정없이 얕본다.
  "에그, 팔까지 떨어져 나간 것이 무슨 국보야. 우리 것은 정말 보잘 것 없어."
 나는 가슴이 다시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 연구원이 써 붙인 안내판은 너무 어려워 관람객들이 읽지 않는다. "이 불상은 일제 때에 기와 집 250채 값에 해당되었습니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몇 백 억원은 족히 되겠지요." 
"와! 정말이여요. 그렇게 대단한 불상입니까?" 그제서야 관심을 가진다. 미술관 뒤산으로 올랐다. 그곳에는 정원수로 가꾸어진 소나무가 여러 그루 가 서 있고, 아래엔 잔디가 융단처럼 깔렸다. 가끔 공작새도 주위를 서성거린다. 나는 그 아래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만약 세계가 하나되어 우리 것의 소중함을 모르는 세상이 된다면 우리 문화재는 어떻게 될까? 어떻 게하면 국민들이 민족문화재를 더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그래, 문화재를 지키는 일에 생애를 바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목숨처럼 사랑한 국보급 문화재들에 얽힌 뒷 이야기를 글로 남기자.' 그렇다. 아무리 아름다운 명승지라도 전설이나 설화가 없으면 겨울나무처럼 가지만 앙상할 뿐이다. 비 록 메워지고 초라한 연못이라도 선녀와 나무꾼에 얽힌 전설이 전해진다면 왠지 발길이 그곳으로 옮겨 진다. 문화재도 마찬가지다. 모든 문화재에는 수 백년의 세월 동안 소장자의 애환과 사연이 겹겹이 숨 겨져 전한다. 그러나 유물은 스스로 말을 하지 못한다. 누가 만들었는지도, 어떤 주인을 만났었는지 도, 또 몇 살이 되었는지도…. 
 그저 자기를 더 아껴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에게 팔려만 다닌다. 마치 말 못하는 벙어리 기생처럼. 문화재에 얽힌 비화를 수집해 세상에 알리는 일은 문화재에 아름다운 영혼을 입히는 일이다. 문화재 한 점을 지키고 보전하는데 일생을 다 바친 선각들이 있음을 알고, 또 문화재가 겪어야 했던 아픔 사 연을 알게 된다면 문화재를 더욱 사랑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때 부터 나는 국보급 문화재에 얽힌 비화들을 수집하려 다녔다. 천지사방으로 녹음기를 들고 골동상 을 찾아다녔다. 어떤 사람의 이야기는 신빙성이 없고 어떤 사람은 행여 도굴과 관련된 자신의 과거가 탄로 날까봐 아예 만나주지 조차 않았다. 그 와중에서 운 좋게 만난 분이 김동현씨이다. 그 분은 국보 5점, 보물 5점을 포함하여 300여점의 금속 유물을 수집한 대수장가며 금속유물 감식가이다. 평생을 걸쳐 수집한 유물을 모두 H미술관에 양도하였다. 

 나는 그 분과 부인을 여러 차례 만나며 문화재에 대한 애정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그래서 그 분의 일생을 중심 축으로 하여 민족 문화재의 수난사이자 문화재를 지켜 내는 일에 온 생애를 바친 위대한 선각들의 투쟁기를 글로 쓰기 시작하였다. 연애 편지 한 장도 밤을 새워서 쓰고, 그것도 아침이면 구 겨 버린 실력이다. 뜨거운 여름도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고 원고지 3,000매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글을 마쳤다. 그렇게 해서 96년 2월에 나온 책이 『실록소설 문화재 비화』이다. 이 책에서 나는 오랜세월 동안 우리 민족에 의해 창조되고 향유되어온 문화재가 임란과 일제시대, 한 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어떻게 약탈되고 파괴되었는지를 해부하듯 다루었다. 그리고 지금 국내에 남아 있는 국보급 문화재가 우리 앞에 자랑스런 모습을 보여주기까지 어떤 우여곡절을 겪어 왔는지를 소설 형식을 빌어 엮었다. 
 책이 나오자, 나는 세상에서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가슴 벅차는 밤이 지나가고 날이 밝았다. 삐삐가 그날처럼 많이 울려 댄 적이 없었다. 삐삐에 불이 났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연속해서 신문사의 인 터뷰가 잡혔다. 『조선일보』에서는 《화제의 저자》로 나를 소개했고, 라디오와 TV에서 출연해 달라 는 제의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