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은 그가 속한 기업의 경영 이념을 충실히 따르고 또 맡겨진 업무를 성실히 수행해야 한다.
 기업을 대표해 처리한 업무에 대해서는 책임도 져야 한다. 더불어 업무 능력을 발전시키기 위해 자기 계발도 소흘리하면 안된다. 책이 나오자 나는 벅찬 가슴을 안고 미술관의 운영 실장을 찾아갔다. 그런데 책을 받아 든 H실장은 칭찬의 말 한마디 없이 얼굴이 잿빛으로 변하였다. 그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내용보다는 뭔가를 찾기 위해 애를 쓰는 눈치였다.

  "고 과장, 책이 더 있으면 줘요." 나는 기쁜 마음으로 몇 권의 책을 더 건네곤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서 책의 주인공인 K씨에게 책을 드리기 위해 서울로 향했다. 경비실에 확인하니 H실장은 나보다 먼저 서울로 올라갔다고 하였 다. 불안은 했으나 크게 생각지는 않았다. K씨의 집으로 향하는 순간, 삐삐가 연속해서 울렸다. 자판 을 보니 본사 임원의 전화번호가 찍혀져 있었다. "고 과장, 지금 어디 있어. 당장 들어와. 알았지.

 " 나는 구겨진 종이같은 기분이 되어 회사로 차를 돌렸다. 마치 죄인같은 기분으로 임원의 방으로 들어 갔다. 그곳에는 임원과 간부 몇 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순간, 나의 눈에는 책상 위에 펼 쳐 놓인 나의 책이 들어왔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펼쳐진 곳을 힐긋보니 몇 구절에 빨간 줄이 그어져 있었다. 아, 아! 경남 고령에서 도굴된 가야금관(국보 제138호)에 얽힌 비화를 다른 곳이었다.
  최종 구매자인 L씨가 많은 곤욕을 치렀다는 대목이고, 또 다른곳은 L씨의 형이 장물때문에 감옥살이를 했다는 내용이었다. "고 과장, 이런 책을 쓰면서 사전에 왜 보고하지 안았지?" 임원이 되알지게 쏘아 붙였다. 나는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호흡을 깊이 들여 마 셨다. 
 "물론 정식으로 보고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미술관의 직원들은 많이 압니다. 특히 문화재에 비전 문가인 제가 이런 책을 쓴다고 하면 믿을 사람이 없습니다.

 " 임원의 목소리에는 창끝과 같은 날카로움이 끼어 있었다. 나는 똑박똑박 대답하였다. 내 입장이 분명 하면 분명할수록 방안의 언성은 높아만 갔다. "H실장, 당장 출판사로 가 발행 부수를 확인하고 시중에 배포된 책을 모두 회수해." 총괄 임원의 명령이 떨어졌다. 임원의 방을 나서자, 정신이 아찔하며 다리가 후들거렸다. '뭐야. 내가 어떻게 쓴 책인데 회수를 해. 안돼.' 나는 속으로 '안된다'라는 말만 되뇌었다. 하지만 그 말은 입안으로만 자자 들뿐 새어나오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나는 꿈에도 상상치 못한 일로 출판사의 H사장과 탁자를 두고 앉았다. 훌륭한 책이 될 것 라며 내 글을 믿어주고 또 선금까지 주었던 분이다. H실장은 회사의 입장을 어렵게 설명하고는 책을 회수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참, 이해할 수 없군요. 이 책은 L씨를 욕보이기보다는 민족 문화재를 수호한 선각자로 떠받들고 있어 요. 기자들은 S기업의 사주를 받아 이 책을 썼다고까지 빈정거려요.

 " 일만 삼천 부에 이르는 발행 부수에서 그때까지 책 도매상과 서점으로 출고된 내용의 자료가 책상 위 에 올려졌다. H사장은 시국 사범으로 옥고를 치른 과거를 빗대며 단호한 어조로 잘라 말했다. 
 "아실 지 모르지만 저 역시 순탄하게 살아온 사람은 아닙니다. 책을 회수할 수는 없습니다." 회사도 그 정도에서 물러섰다. 사건을 더 확대하기보다는 무마하는 쪽으로 방향을 급선회한 것이다. 나는 얼떨한 기분이 되어 용인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사연도 모르는 라디오와 신문들은 줄지어 전화 를 해 왔다. "이미 스케줄이 잡혀 대안이 없습니다. 생방송이니 시간 맞추어 출연해 주십시오." 

 직장인으로서 사적인 취향이나 연구가 남의 칭찬보다는 질책 받기가 쉬운 세태임을 새삼 깨달았다. 하지만 끊임없이 나를 몰아가는 화두(話頭)는 회사에 대한 두려움도, 내 가족의 생계 문제도 아니었 다. 우리 문화재에 얽힌 이야기를 진실되게 후손에게 알려 그들이 우리 문화재를 더 이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만들겠다는 사명감, 오직 그것 하나였다. 
 '용기에는 언제나 책임과 고통이 따른다. 하지만 그로 인해 세상은 더 밝아질 수 있다' 회사는 몇 번이고 인터뷰와 라디오 출연을 제지하였다. 하지만 서로가 설득할 수 있는 한계선은 이미 넘어서 있었다. 주위의 우려섞인 충고가 뒤를 따랐다. 훌륭한 일을 했다는 칭찬도 받았다. 그런데 칭 찬과 질책에 묘한 선 하나가 그어져 있음을 깨달았다. 조직 내에서 내가 업무를 보고하는 라인은 모 두 질책을 퍼부었고, 그 이외는 사람들은 칭찬을 하였다. D일보의 어느 기자는 만약 회사에서 불이익 을 받는다면 즉각 알려 달라는 말까지 남겼다. 하지만 대세는 점점 악화 일로로 치달았다. 직속상사들이 나를 단죄하려 들때, 나를 편들어주던 주변 의 사람 모두 철저히 방관자적 입장으로 돌아서는 것이 조직의 생리이다. 책이 출간되고 10여일이 지 났을 때이다. 징계위원회가 열릴 것이니 참석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미 각오했던 일이라 담담했다. 그 이상도 각오하고 있었던 터이니 시간에 맞추어 회의실로 들어갔다. 십 여명에 가까운 징계위원들 이 나를 에워싼 채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소형 녹음기가 열심히 돌아갔다. "고 과장이 만약 삼성 전자에 그대로 있었다면 이 책에 쓴 내용들을 알 수 있었나요?" "불가능합니다." 
 "그럼 업무상 취득한 지식을 사적으로 이용하고 기밀까지 누출했군요. 그리고 책에 실린 문화재 사진 은 어떻게 수록했지요?" 

 "제가 업무상 관리하는 회사의 슬라이드를 이용했습니다. 독자들에게 좀더 선명한 사진을 제공해 주고 싶었습니다." "회사의 자산을 마음대로 이용해요? 그건 기물 파손 행위입니다. 그리고 왜 책을 쓰면서 보고를 하지 않았지요?" 

 "어느 누구도 저를 전문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좋은 내용으로 책을 쓰면 무마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상사에게 일거수 일투적을 보고하지 않는 것은 조직원으로서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으면 하세요." "이 책은 민족 문화재를 지킨 분들의 위대함을 밝힌 책입니다. 사실을 쓸려고 노력했지 누구를 욕보이 자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선처해 주십시오." 그로부터 '나쁜 놈'이란 비난과 '책 내용이 너무 좋다'라는 칭찬이 동시에 들었다. 어수선한 날이 지 나가고 있을 때 H실장으로부터 일 호봉이 깎여 서울 본사로 전배 조치가 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표 면상 징계 사유는 조직 내에 보고하지 않은 점 업무상 취득한 정보를 사외에 유출한 점 슬라이 드의 무단으로 반출한 점이었다. 하지만 진짜 징계 사유는 L회장과 그 형이 골동품 때문에 겪은 고초 가 다시금 세상에 알려짐으로써 혹시 회장이나 비서진의 노여움을 사 스스로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하 는 경계심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만약 나로 인해 그 분들이 불이익을 받는 다면 나는 당연히 백 번이라도 용서를 빌었어야 한다. 새로운 업무는 전승이 어려운 무형문화재를 어떻게 지원하여 활성화하고 또 계승할 수 있는지를 연구 해 사업으로 추진하는 일이었다.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이라는 명제 하에 오랫동안 추진이 미뤄져왔 던 프로젝트였다. 이제서야 원가관리맨에서 문화 담당자로 회사 내에서 은근히 인정을 받은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한번 상처난 마음은 쉽게 아물지가 않았다. '그래 무형문화재를 현대에 맞게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해. 이 일은 나 아니면 세상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어.'
  새로운 용기가 생겨났다. 징계를 받아 유배당했다는 사실도, 부하가 없는 나 홀로 과장이란 사실도, 용인에서 서울로 매일 3백리를 출퇴근하는 고통 따위도 별게 아니었다. 무형문화재에 대한 자료들이 차곡차곡 정리되고, '무형문화재의 현대적 계승'이란 매력적인 사업의 틀이 기초부터 차근히 쌓여갔다. 사명감 하나로 살아가는 인간문화재를 감사의 마음으로 만나러 다녔다. 그들의 투박한 손과 깊게 파 인 주름은 나를 편안히 내버려두질 않고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게 했다. 여러 번의 회의와 사회 각층의 자문을 받아 보전이 시급한 공예 분야부터 먼저 지원하기로 방침을 정 했다. 업무를 열심히 추진하는 가운데서도 주말이면 역사 인물의 묘를 쉬지 않고 찾아다녀 전국적으 로 150여명에 이르는 답사를 만 3년만에 마쳤다. 
 밤도 잊고 글을 쓴 시간들이다. 이미 역사 인물을 소개하는 책자는 여러 권이 나와 있다. 하지만 대다수는 그들의 사상과 치적을 소개하는 인물서가 주 류이다. 그 분들의 진솔한 삶의 체취를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예를 들어 여류 시인 허난설헌의 시를 연구해 박사 학위를 받은 학자는 몇 십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광주에 있는 그의 묘를 참배하고 그 곁에 있는 아들과 딸의 작은 무덤을 바라본 사람은 적은 듯 싶다. 죽어서도 자식을 걱정 하는 엄마의 애틋한 사랑에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낀다. 또 정실 부인인 허난설헌은 버려두고 후실 인 홍씨와 묻힌 남편의 묘를 보면 죽어서도 혼자인 허난설헌의 외로움을 느낄 수 있다. 또 역사 인물 의 묘를 소개하는 책자도 시중에 나와 있으나 대개는 풍수서에 국한된다. 명당위주로 소개하다 보니 자연히 역사적 인물보다는 묘터에 중심을 두었고, 또 인물의 선정에도 편협성이 많다. 역사인물의 묘를 찾고 난 다음 그 분들의 일대기를 쓰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수없이 되뇌었다. '꼭 지키고 보존해야 할 선현의 묘가 산업화· 도시화로 날로 없어진다. 옛날에는 궁벽한 산골이었을 그곳이 지금은 공단과 아파트가 들어서고, 인적이 닿지 않는 곳에는 잡초와 잡목이 뒤덮여 형태까지 잃어버린 것도 많다. 곧 없어질 문화 유산을 두 발로 다니며 밝힌 이 글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다면 막연한 한 가지 생각이다.

  즉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에 역사 인물에 대해 실체를 찾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글이 길잡이가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은 몇 백년이 지나야 더 가치가 있을 것이다.' 묘지라는 특이한 소재를 통해 역사 인물들을 재해석한 독특한 역사 에세이 『한국의 묘지 기행(자작 나무 간)』이 세 권으로 출간되었다. 또다시 라디오의 출연 요청과 신문사의 인터뷰가 쇄도하자, 나는 출연 여부를 상사와 협의하였다. "직장인으로 생각을 잘 해서 처신하시오." 그 말은 되도록 방송 출연이나 신문에 기사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나 역시 극도로 자 제하면서 인터뷰에 응했다. 여러 잡지가 부탁하는 원고 청탁도 마지못해 응했다. 그것은 다시 추진하 는 '무형문화재 지원사업'이 불미스런 일로 인해 담당자가 바뀌거나 중단되어서는 안된다는 나름대로 의 계산에서 비롯되었다. 책을 이사들에게 선물하고 싶다는 뜻을 상사에게 비추었으나 대답은 시원찮 았다. "내가 알아서 할게. 나중에 보자고."

  그 후도 책을 달라는 얘기는 없었다. 뭔가 앙금이 가시지 않는 듯한 상태로 직장 생활이 계속되었다. 책이 메스콤에 소개되자 실로 엄청난 사람들로부터 전화와 편지를 받았다. 잘 썼다는 칭찬도 있었으 나, 게중에는 자기 조상을 욕보였다면 노발대발하는 분도 있었다. 『한국의 묘지기행』이란 책이 나에게 준 것이 있다면 답사와 집필이라는 괴물에게 바치느냐고 몇 년 동안 저축을 제대로 못한 점과 문화재 전문가로 세상이 인정해준다는 점과 그리고 인생 항로를 바꾼 기인을 만난 것이다. 어느 날 사무실로 전화가 왔다. "나는 풍수를 공부한 사람인데, 고 선생의 책을 잘 보았어요. 그런데 묘를 찾으면서 좌향(坐向)과 파 (破:물이 나가는 방향) 그리고 내룡(來龍:산자락)의 설명이 없는 것이 안타까워요. 한 번 만났으면 좋 겠어요."

 몇 번의 약속 끝에 우리는 S호텔의 커피숍에서 얼굴을 마주 대했다. 그 분이 바로 나의 풍수 스승인 P선생님이시다. 연세가 60대 후반이시고, 젊어서는 일본 이또츠 상사의 차장을 지내셨다. "나 또한 참으로 어렵게 풍수를 공부했는데 마땅히 물려 줄 사람을 구하지 못했어요. 나를 따라 배우 지 않겠오?"
  P선생은 나를 D문고로 데려 가서는 풍수에 관한 책을 두 권이나 사주며 읽어보라고 하였다. 나의 풍 수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