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뜨거워지더니, 구미의 포장마차에서 한 결심이 머리를 화끈하게 달아 올렸다. 
나의 부모는 충북 괴산에서 태어나 대대로 농사을 짓던 소작농이다. 그것도 낫놓고 기역자로 모르는 문맹인으로 똑똑한 자식들을 초등학교밖에 가르치지 못했다. 나는 자그마치 마흔 다섯이나 된 어머니 가 낳은 늦둥이이다. 그러니 그림이니, 음악이니, 문화 같은 것은 애당초 몰랐다. 내 책과 공책을 야 금야금 뜯어다 담배를 말아 피우시는 아버지가 싫었고, 술만 잡수시면 술이 깰 때까지 어머니와 말다 툼을 벌리는 아버지가 싫었다. 다른 아버지들과 사사건건 비교가 되었다. 돈이 없으니 중학교도 한해 쉬고서 겨우 입학할 수 있었으나, 다행히 이발사였던 형이 서울로 전학을 시켜 공부를 시켰기에 대학 물이라도 먹을 수 있었다. 

연극은 딱 한 번 제목조차 잘 생각나지 않은 것을 본 것이 전부이고, 영화라면 회사 동료끼리 본 것 이 전부다. 그것도 상영 시간 내내 졸아서 숙박비를 내라는 핀잔까지 들었다. 음악이라면 고등학교 다 닐 때 강당으로 내몰려 눈을 감고 억지로 감상을 하였던 기억밖에 없다. 그런 나를 두고
  '문화, 예술 계통으로 가면 성공한다'라고 했으니 가당찮게 여겨졌다. 하지만 무엇인가가 나를 자꾸만 잡아끄는 느 낌이 들었다.
 다음 날, 전화번호부를 뒤져 서울에 있는 화랑들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카피했다. 그리고는 굵은 글씨 이거나 박스 광고가 나온 화랑에다 전화를 걸어 위치를 확인하였다. 
"사장님 계세요?" 
 화랑에 들어선 나는 대뜸 안내 데스크로 걸어가 정장한 여직원에 말을 걸었다. 처음의 눈빛은 상냥했 지만 순식간에 깔보는 눈초리로 변했다. 나중에는 관심없다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올려다 보았다.
 "왜 그러시죠?" 
"저는 삼성 전자에 다니는 고과장입니다. 
이곳에 취직을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혹시 직원을 뽑지 않 을까해서요." 
"몰라요. 지금 사장님은 안계세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하는 식의 말투가 역력했다. 나는 밤을 새워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찾아온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는 처삼촌 묘 벌초하듯 건성으로 대했다. 당황하자 말까지 더듬거렸다. 
"여, 여기 명함이 있습니다. 사, 사장님이 오시면 말씀 좀 전해 주세요. 부, 부탁합니다." 유명한 화랑들을 며칠을 두고 돌아다녔다. 하지만 모두 똑같은 반응이었다. 물론 언제까지도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더 이상 앉아서 기다릴 수만 없어서 이 화랑 저 화랑을 들쑤시고 다녔다. 절망했다. 엉엉 소리내어 울고 싶었다. 속을 시꺼멓게 태운 끝에 아는 분과 상의하였다. 
'문화와 예술 계통에 종사하면 밥을 굶어. 그러니 허튼 생각하지 말고 일이나 해. 여기서 출세를 하 라고.' 고마운 충고였다. 하지만 마음만은 사정없이 황량해졌다. 책상에 앉아 밤을 하얗게 세워도 뾰족한 대 책은 없었다. 상대를 나와 관리 업무만 한 나이다.

  문화, 예술 계통으로 간다는 것이 너무 황당한 꿈 인가! '호암 미술관이 있잖아. 정 그렇다면 그곳에 문의를 해 봐.' 뜻밖의 사람에게서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을 들었다. 상사가 꼴보기 싫다는 이유 하나로 줄곧 문제의 해답을 회사 밖에서만 찾던 중이었다. 즉시 삼성문화재단의 인사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N부장은 고맙게도 내 말을 친절히 들어주었고, 이력서까지 보내 달라고 하였다. "현재는 빈자리가 없는데 한 번 노력해 볼께요.
" 피를 말리는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곧 연락을 주겠다던 약속은 여름이 지나가도 전화 한 통이 없었다. 야속하다는 생각이 머리에 들어찼다. 이유없이 원망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행여 잊지나 않았나 싶어 두 번이나 편지를 다시 보냈다. 그래도 연락이 없었다. 흡사 벽을 바라보고 소리를 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몸과 마음도 지쳐 갔다. "호암미술관에서 운영 실장이 올라왔으니 한 번 면담을 해 보세요." 
그러던 어느날,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뛸듯이 기뻤다. 즉시 달려가 H실장과 면담을 하니, 고미술품을 정리할 간부가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관리 이사도 만났는데 운 좋게도 삼성항공에서 상사로 모셨던 분이라 희망이 보였다. 

 W이사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고 과장, 나는 좋은데 문제는 미술관에 있는 L부관장을 설득해야 돼. H실장, L부관장께 잘 말씀 들려 봐. 어렵겠지만….
 " 구름 위를 떠다니는 기분으로 회사로 돌아왔다. 세상이 온통 희망으로 가득차 보였다. 그렇지만 그 희 망은 며칠을 가지 않았다. 또 다시 깜깜 무소식이었다. 어둠의 긴터널을 비춰 줄 빛줄기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고 또 그렇게 시간만 흘러갔다. N부장을 찾아보았더니 말끝이 흐려 있었다. 그래서 미술관 의 H실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부관장께 말씀을 드렸어요. 그런데 삼성 전자에서 관리 업무를 하던 사람이 무슨 소장품을 관리하냐 며 핀잔만 들었어요. 나는 포기했어요." 수화기를 잡은 손이 파르르하니 떨려 왔다. 억지로 말을 이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부관장님을 직접 찾아뵈면 안되겠습니까?" "맘대로 하세요." 다음 날, 회사에 월차를 내고는 용인에 있는 미술관을 찾아갔다. 에버랜드(당시는 자연농원) 내의 저 수지를 낀 미술관은 삼성의 창업자인 L회장이 심혈을 기울여 수집한 국보급 문화재를 삼성문화재단에 기증하여 탄생한 곳이다. 저수지를 돌자, 양 옆으로 줄을 맞춘 벗나무에 울긋불긋한 단풍이 물들고 있 었다. 미술관 안에는 L회장의 동상과 묘가 있다. 미술관으로 들어선 나는 사무실이 아닌 L회장의 묘로 올라가 절을 넙죽 올렸다. 
 "호암 선생님, 도와주십시오. 저를 이곳에서 근무하게 해주신다면 기필코 은혜를 갚겠습니다. 제발 부 탁드립니다." 
'호암(湖巖)'은 L회장의 아호(雅號)이다. 애원 아닌 애원이 십 분이나 이어졌다. 곧바로 일어서면 고인 이 노하여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것만 같았다. 눈물까지 핑하니 돌아서 잠시 동안 쉬었다가 사무실로 들어갔다. L부관장이 경계의 눈초리로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옷차림이 빈틈없는 깔끔한 분이었다. "어떤 일로 오셨지요?" 
 "H실장이 말씀드렸던 삼성전자의 고 과장입니다. 저는 들어오면서 호암 선생의 묘에 들렸습니다. 이곳 에서 근무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히 빌었습니다." 
"예?" 
그로부터 30여분 동안 질문과 대답이 이어졌다. 나는 H 미술관에 근무하고 싶다는 바램을 간절하게 또박또박 이야기하였다. 물론 책을 보고 인생의 방향을 결정했다는 말은 듣기에 따라서는 장난처럼 들릴 것 같아 생략하였다. 나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던 L부관장이 마침내 결심의 뜻을 내비치며 큰소 리로 말했다. 그는 활짝 웃고 있었다. "고 과장 같은 분이 왜 아직도 삼성 전자에 근무하죠?

  H실장, 고 과장이 이곳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힘써 봐요.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얘기하고요."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런 조건없이 아무 것에나 감사하고 싶어졌다. 사무실을 빠져나온 나는 L 회장의 묘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고맙습니다. 호암 선생님!' 며칠 뒤에 삼성문화재단에서 나를 보내달라는 할애요청이 왔다. 이후로는 별다른 어려움없이 나는 H 미술관의 '소장품관리팀장'으로 변신하였다. 나의 두 번째 퇴사며, 첫 번째 퇴사와는 달리 나 자신을 찾기위해 스스로 선택한 자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