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나는 대학 생활 내내 취직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 본 적이 없다. 요즘이라면 입학과 동시에 취직에 대한 걱정으로 토익 시험이다 취직시험이다하여 일찍 감치 도서관에 엉덩이를 붙이고 비지땀을 흘려야 하겠지만 당시는 5공시절이다. 헐레벌떡 교문에 들어서면 철문은 철커덕하고 굳게 닫혔고, 중무장한 전경들이 험악한 눈으로 쏘아보기 일쑤였다. 강의 도중에라도 학생이 옥상으로 올라가 전단을 뿌리면 그것으로 바로 강의는 중단되고, 매캐한 최루탄 연기에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되었다. 군사정권 아래서 대학이 어용과 대항이라는 양갈래 길에서 헤맬 때 나는 대학을 다녔다. 대학시절 나는 많은 학생들이 청운(靑雲)의 꿈에 부풀어 도전하는 고시공부를 하였다. 2학년 때까지 공인회계사가 되어 보겠다며 제법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다녔다. 하지만 지금와 돌이켜보면 제대로 공부한 기억이 없다. 그저 어린 치기(稚氣)에 폼 잡기에 급급했고, 이 친구 저 친구 따라서 덩달아 공 부한 것에 불과하다. 

시험에도 응시하였으나 보기 좋게 일차에서 떨어졌다. 그때를 생각하면 어설픈 고시공부를 한 기억외에 포장마차가 떠오른다. 독산동에서 살았는데, 초등학 교 담벼락을 끼고 포장마차가 하나 있었다. 주인은 혼자서 삼남매를 키우며 어렵게 사는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였다. 술의 명제는 언제나 하나였다. 스스로 깨닫지 못한 끼가 불출하지 못해 비어있는 공간 을 술로 메우는 것이다. 이후로도 정체모를 갈증에 시달리도록 나를 내몰고, 어느날 더 이상 억누르기 힘든 분출력으로 솟구쳐나와 나의 삶을 송두리채 바꿔 놓은 끼는 결국 지금의 나로 변화시켰다. 포장마차를 들락거리던 지우(知友)들이 재미삼아 일년의 통계를 뽑아본 적이 있다. 출석 일수가 가장 많은 사람을 '회장님'으로 불렀는데, 지금 한전에 근무하는 친구가 매년 차지하였다. 나도 그에못지 않 아 일주일에 5일을 꼬박 출석하여 2등인 총무가 되었다. 학교를 졸업한 후, 각자의 생활에 빨려들어 간 탓인지 그 시절 막걸리 잔을 무수히 기울이던 벗들도 모두 멀어졌다. 세월은 사람뿐만 아니라 정 (情)마저도 데려가는 모양이다. 졸업이 가까워지자 홀쭉하던 배는 막걸리가 쌓여 '사장님 배(?)'가 되었다. 애당초 적성이 맞거나 무슨 포부가 있어 경영학과에 입학한 것이 아니었다. 가난한 집안 형편을 고려해, 취직이 비교적 수월하다 는 상대에 입학했을 뿐이다. 또 입학 성적이 좋았던지 〈4년간 등록금 전액 면제〉라는 장학금 혜택 이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다. 당초의 기대대로 4학년 여름이 되니 이 회사 저 회사에서 오리엔테이션 이 있으니 참석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꼭 입사하고 싶은 회사가 있던 것도 아니라 친구들과 몰려 다 니며 회사나 구경하고 다녔다. 

찬바람이 돌 때이다. 삼성 그룹에 입사 지원서를 보냈더니 서류에 합격했다는 통지를 받았다. 가족들 은 기뻐했지만 나는 무덤덤하였다. 이어서 면접이 있었다. 지금의 대학생이라면 무척이나 부러워 할 일이지만 그때는 정말 그랬다. 용인의 삼성연수원으로 들어가던 날이다. 그 날은 참으로 눈이 많이 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입소식을 마치자, 연수원 복장으로 갈아입고 다시 집합하라는 구령이 떨어졌다. 벌점을 30점 이상 받으면 그 즉시 퇴소시킨다는 협박에 겁을 먹었다(물론 퇴소한 사람은 없다) 잽싸게 지정된 장소로 달려간 나는 깜짝 놀랐다. 네 명의 이발사가 신입 사원들의 머리카락을 무지막지하게 잘라 내고 있었다. 1980년인 것으로 기억난다. 유원지로 놀러 갔다가 군인에게 붙잡혀 머리에 일차선 도로가 뒷통수까지 났다. 당 시는 장발이 유행하던 때라 너나없이 머리를 길게 길렀다. 장발의 머리카락을 삼성의 표준 두발로 만 들었던 것이다. 

한 달에 걸친 신입사원 교육은 전국에 있는 계열사의 견학으로 끝났고, 삼성항공(당시는 삼성정밀)으 로 배치되었다. 출퇴근이 어느 정도 몸에 익자, 수습 교육을 마치고는 '항공판매부'에서 일하게 되었 다. 맡은 업무는 육· 공군의 전투기 엔진에 대한 창정비 물량을 수주를 받는 일과, 조달 본부와 계약 을 체결하고 납품 대금을 받는 일이었다. 상사와 선배들도 잘 지도해 주었다. 영업부서였지만 군의 계 획된 정비 물량을 1년에 한 번만 계약하니 업무량은 많지 않았다. 창원에 소재한 공장에도 가끔씩 출 장 다니며 공장 직원들과 재미있게 어울렸다. 여름이 되면서 10년을 넘게 연애하던 사람과 결혼하였다. 신혼 생활과 회사 생활은 바쁘게 흘러갔다. 혈압이 높아 매일 아침에 조깅했던 일과 또 일 년에 50만원을 열심히 저축한 것이 떠오른다. 당시 월 급이 28만원이었는데 이것저것 제하면 24만원 정도가 남았다. 이 돈으로 5만원은 사글세로 내고, 바 삐 둔 딸과 함께 13만원을 생활비로 쓰고 나머지 몇 만원은 점심값 등의 용돈으로 썼으니 많이도 저 축한 셈이다. 수입의 전부는 월급뿐이니 덜 쓰고 덜 먹는 방법밖에 없었다. 업무는 과중하지 않았지만 회사에 다닌 다는 핑계로 일년 내내 책 한 권도 읽지 않았다. 허둥지둥 2년을 보내고 나니 관리부서로 전배되었다. 아마도 전공을 감안한 인사 조처였을 것이나 고생은 그 때부터였다. 방산 물자에 대한 원가를 계산하 는 업무이다. 품목별로 정부가 계약할 금액을 정하는 일이라 중요하고도 까다로웠다. 정부 담당자와 계약 건마다 가격을 두고 시소게임을 벌렸다. 귀가는 자연히 늦어지고 휴일도 반납했다. 바쁘다는 말 이 입에서 저절로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