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없이 살았던지 생활의 문제가 빨리도 닥쳐왔다. 어린 딸과 아들이 서로 엉켜 장난을 처대니 시끄럽다며 주인이 전세방을 빼달라고 성화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돌아다보니, 지하실의 한칸 셋방이 이제 네 식구가 살기에는 너무 좁았다. 벽면의 한 쪽은 장농이 차지하고, 창가엔 냉장고와 TV 그리고 책장, 아이들 장난감하고 간신히 다리를 뻗을 공간만 남았다. 아이들이 하루하루 커가니 방은 점점 좁아만 갔다. 방을 넓혀 가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침 방산 사업의 일부가 삼성 전자로 이관되었다. 5백만 원에 가까운 퇴직금이 생길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원가관리를 핑계삼아 삼성전자로 따라 갈 것을 결심하고 입사 6년만에 회사를 옮겼다. 첫 번째 퇴사로 순전히 가장(家長)의 책임을 다하기 위한 나름 대로의 돌파구였다. 그런데 삼성 항공에서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던 사업이 삼성 전자로 이관되자, 전자의 거대한 사업 군에 파묻혀 전혀 빛을 보지 못했다. 그 와중에 대리였던 나 역시 우여곡절을 겪으며 구미 공장의 경 리과로 전배되었다. 그 당시 분양받은 아파트가 있어 중도금이 들어갔는데, 구미는 전세금이 싸 그 차 액을 중도금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공장은 업무의 과부하를 떠나 타관 사람이 근무하기에는 버거운 곳이다. 일도 고되었지만 지방 텃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경리과는 대체로 상고 출신이 많아 타 지역 대졸자는 따돌림을 받기기 쉽상인데, 그곳 역시 대구의 D상고 출신이 터주대감이었다. 

 결국은 과장 진급에서 누락되었다. 나는 이곳 저곳을 떠도는 철새이고, 자기 사람 키워 주기에 바쁜 조직 생리 상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괴로웠다. 화가 치밀어 하루 동안 출근하지 않았다. 다음 날, 겨우 출근을 했다. 머리를 숙인 채 사무실로 들어섰을 때이다. 첫느낌이 너무 조용했다. 가볍게 눈 인사를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신문에서 잠시 눈을 떼고 인사하더니 그만이었다. 특히 나 보다 나이가 적은 동기가 나의 상사가 되어 업무 지시를 할 때면 화가 치밀었다. 햇살이 등 허물을 벗겨 낼 듯이 뜨겁게 내려 쪼던 날이었다. 회식이 있었는데,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 은 채 술만 마셨다. 동기 과장의 훈시하는 듯한 말투가 참기 어려웠고, 화제는 회사 이야기 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조용히 밖으로 나와 근무복을 벗어 어깨에 걸친 채 비틀거리는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 았다. 시내 거리는 네온싸인으로 불야성을 이루었지만, 달빛은 그것보다 훨씬 밝아 보였다. 

〈달아! 너는 천성이 변덕스러워 항상(恒常)하지 못함을 너를 만났을 때부터 알았다. 너의 모습은 보 름달-반달-초승달-그믐달, 참으로 많으니 진짜 너는 없는 것이다. 하나 너는 이미 내 골수에 새겨져 네가 구름에 가리고 태양에 눈 멀고 아니 네 스스로 모습을 감춘다해도 너를 연모(戀慕)하는 내 마음 을 빼앗지는 못한다. 그러니 너는 실체(實體)가 아닌 허상(虛像)일 뿐이다. 네가 뜨면 나는 너를 벗삼 아 술을 마시며 시흥(詩興)에 취할 것이고, 네가 지면 너를 기다리며 그리움을 키우리라.〉 
 
 축 처진 어깨 위로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다시 술이 고파져 근처의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소주 맛이 몸서리 처지도록 썼다. '어떻게 하지? 무엇을 해야 하나!' 도무지 어떻게 살아야 좋을 지 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지?' 불현듯 출장 중에 진주의 촉석루에 올랐을 때가 떠올랐다. 촉석루의 처마에는 여러 개의 현판 시가 걸렸는데 모두 한자로 쓰여진 시였다. 나는 그 동안 외웠던 한시의 뜻들을 기억해 내곤 천천히 해석 을 시도하였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생의 회한(懷恨)을 읊은 시들로 하나같이 산수화를 보듯이 아름 다웠다. 현판에서 눈을 떼어서 남강과 의암을 내려다보았다. 시 구절이 절묘하게 오버랩 되며 눈부시 게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시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순간, 나는 무릎 을 쳤다. '그래 저 현판 시를 한글로 번역해 현판 밑에 조그맣게 붙여 놓으면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을거야. 그러면 주변의 풍광을 좀더 아름답게 즐길 수 있어.' 나는 소주잔을 급히 털어 넣으며 쓰디쓴 결심을 했다. '그래 누가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 전국에 있는 누와 정자를 모조리 찾아보는 거야. 그리고 부착된 현판시 아래에 해석 명판을 붙여 놓자. 그 일은 내가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며 또 그 일을 마친다면 세상을 후회 없이 산 사람으로 자부할 수 있을 거야.' 그 해 가을 과장으로 승진하여 서울 본사로 올라왔다. 물론 업무가 변한 것은 없었다. 원가업무는 바 삐 돌아갔고, 시간은 늘 모자랐다. 보름달이 뜬 날, 구미에서 했던 결심마저 언제인가 내 몸에서 빠져 나가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퀭한 허무감은 아니였다. 결심을 실행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 다는 목마름이었다. 
 
 그런데 또다시 회사에서 어려움이 생겼다. 부장이 동료 과장만 끼고 돌며 사사건건 시비를 잡았다. 그 과장과는 자주 외출해 팀경비를 쓰면서 나와는 동행하지 않았다. "고 과장, 이 영수증 뭐야? 회사 돈을 이렇게 함부러 써도 되는거야?" 내가 접대 차 쓴 경비에는 사사건건 시비를 잡으니, 도저히 얼굴을 맞대고 근무할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 출근이 지옥 같으니 자연히 업무 능률도 떨어지고 활기도 잃어 갔다. 뭔가 또 다시 절벽에는 부딪쳤다는 생각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돌파구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업무 차 구미 로 출장을 갔다. 기차 안에서 그동안 막연하나마 생각했던 퇴사를 곰곰이 떠올려보았다. '아, 힘들다. 만약 회사를 그만두면 무엇을 하지. 내가 잘하는 것은 무엇이고 진정 원하는 것은 뭐지?'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스스로 잘 하는 것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영어실력도 형평없었고, 컴퓨터 도 기초 수준이고, 원가업무는 하지만 회계기장과는 달라 자신이 없었다. 즉 업무 상 취득한 지식은 방산물자원가계산에 국한된 업무처리기술에 불과했다. 갑자기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 라왔다. 나만이 낙오되어 추락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무능한가? 공자는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君子不器)'라고 했어. 간장 종지는 깨질 때 까지 간장만 담고 밥그릇은 밥만을 담지. 그릇이 아니라는 말은 한 가지 용도로만 쓰이는 그릇이 아 니라는 뜻이야. 어디에나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해.' 순간, 산 쪽에 고즈넉이 자리잡은 이름 모를 무덤이 선명하게 바라보였다. 문득 궁금증이 솟아났다. '나는 이렇게 삶이 뒤죽박죽인데 저 무덤 속에 있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다 갔을까? 직업은 무엇이고, 몇 살까지 살았으며, 어떤 사연으로 살다가 죽었을까!' 해마다 조상의 묘를 찾아 벌초를 했지만 한번도 진지하게 가져 보지 못한 의문들이다. 그들 또한 시 공(時空)을 초월하면 나와 똑같이 삶을 버거워하며 살았을 것이나, 그를 모른다는 이유 하나로 지나쳐 버렸다. 무덤은 한 사람이 이 땅에 살았다는 확실한 증표이며, 그를 기억하는 사람에겐 추모할 여지를 남겨 주는 최소한의 유품이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 내내 나는 그런 생각들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