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가을, 필자가 호암미술관에 근무할 당시 격었던 사건이다. 국보인 청자진사주전자만 생각하면 지금도 이마에서 식은땀이 솟는다. 하루는 제일 기획(주)에서 사람들이 파견되어 사무실로 들어섰다. “과장님, 이번에 삼성문화재단에서 재단 이미지 광고를 위해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해 왔습니다.” “예. 어떤 문화재를 가지고 연출하시겠어요?”
당시 필자는 소장품을 관리하는 책임자였다. 호암 미술관은 동양 최대의 사립 미술관으로 90여 점의 국보와 보물을 비롯해 2만 5천여 점의 귀중한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어, 방송국에서 수시로 소장품 촬영 협조를 부탁해 왔다. “청자진사주전자를 한 소녀가 바라보며 우리 문화재의 향기를 음미하는 장면입니다.” “진열장에 전시된 그대로를 촬영합니까?”“아닙니다. 좀더 생생한 화면을 얻기 위해 진열장 밖에 받침대를 설치하고 찍을 생각입니다.” “예? 그럼 청자진사주전자를 반출해 달라고요?” “그렇습니다. 어차피 호암 미술관을 홍보하는 광고이니 이 미술관이 소장한 최고의 명품을 촬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필자의 뇌리에 불길한 예감이 스쳐 갔다.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안됩니다. 저는 소장품을 안전하게 관리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럴리가 없지만 만약에 깨지기라도 하면 어쩝니까?” “과장님, 걱정 마십시오. 최대한 조심을 하겠습니다.” “문화재는 두 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청자진사주전자는 이 나라 최고의 국보입니다. 안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요. 대신 매장에 똑같이 생긴 모조품(이미테이션)이 있으니 그것으로 연출하시지요.” “모조품은 진사의 색깔이 너무 붉어 누가 보아도 가짜라고 생각합니다. 최대한 조심할 것이니 촬영을 부탁드립니다.”
한참 동안 실랑이가 오갔으나 필자는 양보하지 않았다. 결국 촬영팀은 모조품을 12만원에 구해 와 촬영에 들어갔다. 촬영 세트가 갖추어지고 모조품 청자진사주전자가 높게 설치된 받침대 위에 올려졌다. 그러자 나비 모양 머리띠로 긴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빗어 올린 예쁜 소녀가 노트와 연필을 가지고 다가섰다. 촬영팀의 지시에 따라 소녀는 갖가지 표정을 지으며 주전자를 바라보았다. “이쪽으로 돌아 봐.” 그 순간, 쨍그렁하는 소리와 함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위치를 옮기던 소녀가 땅바닥에 어지러이 깔린 전선줄에 걸려 넘어졌고, 순식간에 청자진사주전자가 딱딱한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필자는 아! 하는 탄성을 지르며, 만약 진품이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하늘이 노래지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국보를 깨트려 조상과 후손에게 큰 죄를 진 것은 어떡하며, 250억원을 호가하는 골동품을 한 순간에 박살낸 책임은 어떻게 감당하며, 미술관의 명예 실추는 어떻게 복구하는 가 등등 짧은 순간에 여러 가지 상념들이 떠올랐다.
한참 동안 마음을 진정시킨 뒤 촬영팀은 또 다른 모조품을 사와 촬영을 마쳤다. 광고에 나온 청자진사주전자는 진품이며 이것은 촬영은 모조품으로 한 뒤 진품의 사진을 합성해 만든 것이다. 그 일이 있고서 부터 필자는 가급적 도자기의 경우 진품의 촬영 협조는 거부했다. 모조품 촬영 사건을 경험 삼아 이야기하면 모든 사람들이 이해해 주었기 때문이다.
<사진: 삼성문화재단 광고/ 모조품인 청자진사주전자로 촬영한 뒤에 진품 사진을 합성해 완성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