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제희의 풍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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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충동/기업인 마을…70년대엔 '전경련'을 옮긴듯

[고제희의 풍수기행]-장군이 앉아 지휘하는 명당



    장충동(奬忠洞)은 은 구한말의 애국지사 즉 을미사변과 임오군란 때에 순 직한 충신ㆍ열사들을 제사지내는 장충단(奬忠壇)이 있어 생긴 지명이다 . 남산에서 흥인지문 북쪽인 낙산으로 이어지는 서울 성곽의 남동 능선 에 자리해 도성 내에서 드물게 북동향을 한 마을이다. 그렇지만 이 마을 은 북한산에서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북쪽의 높은 산 능선을 한쪽으로 비 껴 바라보는 유일한 곳이라 서울 내에서 시야가 가장 넓고 길다. 남산의 동쪽 기슭에 위치한 장충동은 조선시대에 한양 외곽을 수비하던 어영청에 속한 남소영(南小營)이 있던 곳으로, 앞쪽에는 군대가 주둔한 형세와 같은 둔군안(屯軍案)이 있고, 왼쪽에는 깃발이 나부끼는 형태의 기고사(旗鼓砂)가 북한산에 즐비해 소위 '장군이 앉아 지휘하는 '장군대좌형(將軍大坐形)'의 명당이다.

    만물을 탄생시켜 길러내는 어머니와 같은 땅은 개성이 무척 강한 생명 체로 땅의 성격에 맞춰 땅을 이용할 때만 지기가 발동해 복을 준다. 장충동은 천하를 호령할 위대한 인물이 배출될 땅으로 무장들과 소응이 잘 맞는다. 장군은 휘하에 용맹스러운 병졸들이 포진해야 위엄이 살며 지덕(地德) 도 발동하는데, 공원을 찾아 즐기는 사람들은 풍수적으로 이 땅의 소응 에 관계된 병졸로 해석함직하다. 지기는 그 땅을 사용하는 사람과도 서로 궁합이 맞아야 발복도 커지는 데, 장충동은 군대가 주둔할 정도로 기가 거센 땅이다. 따라서 무인적 기질이 적은 학자나 예술가, 그리고 기업인들이 이곳에 집을 짓고 살면 번성하기 어렵다. 반면 칼과 창 같은 무기를 사용하는 직업이나 사업은 크게 번창할 터다. 장충동 족발골목은 한국전쟁 중에 피란 온 사람들이 하나 둘씩 족발집 을 내면서 족발 명소가 됐다.'족발장'이란 물에 푹 삶아낸 족발은 비 릿한 맛이 전혀 없고 고기 살은 쫀득쫀득하다. 길고 짧은 칼을 이용해 족발에서 고기 살을 발라내는 매운 손맛을 바라보고 있으면, 다시 한 번 이곳이 군인의 땅임을 마음속으로 가득 느낀다.



[박인호의 현장 르포]-남산 그림자 품은 '회장집'즐비…정주영ㆍ이병철씨도 한때 이웃

    장충동(奬忠洞)은 이름 그대로 '옛 장군과 충신의 동네'다. 우리 근 ㆍ현대사가 변화와 고난의 역사였던 만큼 전통부촌 장충동에는 선조들의 숨결과 고락(苦樂)을 엿들을 수 있는 역사적 에피소드가 너무나 많다. 40대 중반을 넘은 장ㆍ노년층에게는 요절한 가수 배호의 '안개낀 장충 단공원'이란 유행가를 연상케 한다. 한국의 부촌 중 가장 친근감과 추 억을 되새기게 하는 동네다.

    서울 남산 동북쪽 퇴계로에서 훈련원길을 거쳐 동호대교로 이어지는 동 호로 초입에서 왼쪽으로 들어서면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한 동네가 나타 난다. 남산을 바라보며 가부좌를 틀고 있는 형국이랄까. 이곳이 바로 1 98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부촌 중 한 곳인 장충동(정확히 장충동1가)이다. 언뜻 보면 보통 동네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주변의 빌라형ㆍ다세대형 주택을 마치 병졸처럼 거느린 고풍스러운 대저택이 드 문드문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오랜 세월의 나이테 속에 빛은 바랬지 만 위엄이 배어 나오는 대저택의 위용은 전통부촌의 저력을 새삼 느끼게 한다.

    장충동은 장충단(奬忠壇)의 이름을 따서 생겨났다. 1900년 설치된 장충 단은 임오군란ㆍ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 등 풍전등화의 위기 때 나 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ㆍ열사를 기리기 위해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 장충동은 지난 60~80년대 성북동 한남동 평창동 등과 함께 기업인, 정 치인, 고급 관료 등이 대거 모여 살던 대표적 전통부촌이다. 하지만 80 년대 후반 신흥부촌 강남으로 하나 둘씩 떠나가면서 장충동은 부촌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지금은 오래된 많은 대저택이 헐리고 그 자리엔 평 당 3000만~4000만원을 호가하는 최고급 빌라와 상대적으로 값이 싼 연립 , 다세대ㆍ다가구가 어우러져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대저택은 어림잡아 15채 정도. 수많은 사람이 들고 나갔지만, 남아 있는 대저택 대부분은 30년 이상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면서 옛 모습을 고집스레 간직하고 있다.

    수십년 간 장충동에 살면서 통ㆍ반장을 도맡아 오다 현재는 중구의원으로 활동 중인 유현차랑 씨는 "이들 대저택은 대규모 개조공사를 하지 않아 아직 도 내부에 나무기둥을 세운 일본식 건물양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며 "겉모습은 소박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 건축기술은 감탄할 만큼 완벽하다"고 설명했다. 이곳 대저택들은 작게는 400평에서 크게는 2000평 에 달해 비록 호(戶)수는 적지만 그 규모 면에선 성북동이나 평창동의 고급 단독주택을 오히려 능가한다. 장충동은 지난 60~80년대 기업인들이 대거 모여 살면서 전통부촌으로서 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초창기 이곳 부자들은 당시 주력사업이던 제분, 전선, 모방 등의 창업주가 많았다. 장충동이 대기업 오너 1세대의 '제 2의 고향'으로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이병철 삼성 회장과 정주영 현대 회장을 비롯해 유일한 유한양행 회장, 박세정 대 선제분 회장, 이임용 태광산업 회장, 설경동 대한전선 회장, 김재섭 영창악기 대표 등 이 생전에 장충동 터에 몸담았다. 권철현 연합철강 창업 주, 이봉수 전 대한모방 회장도 1세대로 분류된다. 부자동네 장충동의 저력은 한국재계의 양대 산맥인 삼성과 현대라는 대 기업군을 일군 고 이병철 회장과 정주영 회장의 삶터였다는 데서 입증된다. 정주영 회장이 이곳에 거주하며 기업을 키울 당시, 정몽준 대한축구 협회장은 초등학생이었다. 정몽준 회장과 박근혜 한나라당 최고위원은 장충초등학교 동기동창이다.

    이후 정주영 회장의 집은 동생인 정순영 성 우그룹 명예회장이 이어받았다. 정 회장은 이후 장충동에서만 무려 30년 이상을 살아오고 있으니 가히 '장충동 터줏대감'인 셈이다. 이병철 회장의 저택 역시 박두을 여사가 작고한 이후 현재는 관리인이 주인 없는 빈집을 지키고 있다. 이곳의 현 소유주는 한남동 대저택에 살 고 있는 이건희 회장으로 돼 있다. 지금도 이 회장은 가끔 한남동 자택 을 나와 남산 산책로를 따라 장충동까지 산책을 즐긴다고. 삼성 창업주 가 오랫동안 거주했기 때문일까, 장충동 일대는 삼성 계열사가 많이 들어서 있었다. 지금도 장충동 족발골목 인근에 신세계건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또 이병철 회장의 큰아들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과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 내외도 인근 저택과 빌라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고급 관료나 정치인으로는 고재봉 전 서울시장, 박동명 전 농수산부 장 관, 오탁근 전 법무부 장관, 신직수 전 중앙정보부장, 정대철 박근혜 박 성범 의원 등이 장충동을 거쳐갔다.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과 최경호 한 일여객 사장, 박일흠 변호사, 김수용 영화감독, 권철현 연합철강 창업주 아들인 권헌성 전 의원,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오른팔로 통했던 최형우 전 의원, 영화배우 황신혜 씨 등은 고집스레 장충동 둥지를 지키고 있다.

    장충동 대저택은 시세 파악이 잘 안 된다. 워낙 덩치가 커 거래가 거의 없는 데다 행여 매매가 되더라도 당사자 간 은밀하게 이뤄진다는 게 주 변 부동산중개업자의 전언. 대화부동산 이성례 사장은 "장충단길 대로 변 시세는 평당 2000만원가량 한다"며 "현재 대저택 매물은 없고 대지 130여평짜리 업무용 건물 2개동이 각각 30억원에 매물로 나와 있다"고 말했다. 특히 장충동 대저택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조경수는 집의 연륜만 큼이나 고가를 자랑한다. 주민 박모 씨는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이 살 던 집 정원에는 1억원 이상 나가는 '황금나무'도 있다"고 귀띔했다.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장충동에는 역사적 사건에 얽힌 일화가 무척 많다. 을미사변뿐 아니라 임오군란, 갑신정변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서 있었다. 특히 장충단과 장충단공원은 조선말기와 일제시대 등 격변기 역 사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조선말기 병영 남소영(南小營) 자리에 있던 사당은 6ㆍ25 때 불타버렸다. 신라호텔 서쪽 큰 길가에 있던 장충단비는 1969년 공원 안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장충단공원'은 1919년 일제가 조성했다. 청계천 변에 있던 수표교는 59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장충단공원 하면 주먹일화도 빼놓을 수 없다. 인기 드라마 '야인시대 '의 주인공 김두한이 일본 야쿠자와 벌인 장충단공원 혈투는 지금까지 '주먹세계의 전설'로 통한다. 동네 풍경만큼이나 장충동은 고급 입맛과 서민 입맛을 함께 맛볼 수 있 는 곳이다. 서민 입맛을 대표하는 곳이 바로 장충동 족발거리. 장충체육 관에서 동대문운동장 방면 큰길가 태극당 맞은편에는 10여곳의 족발집이 자리잡고 있다. 40여년 전 국내 유일의 실내종합체육관이었던 장충체육 관. 60, 70년대 여기서 레슬링과 권투 등 큰 경기라도 있는 날이면 이 족발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이제 장충동은 더 이상 화려했던 과거의 이미지를 찾아보기 힘들다. 곳곳에 대저택을 밀어내고 들어선 일반 빌라와 다세대ㆍ다가구들은 더 이 상 장충동을 부촌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성곽만큼이나 높은 담벼락 을 타고 떨어지는 황금색 낙엽이 전통부촌 장충동의 아름다운(?) 퇴장을 예고하는 것일까. 박인호ㆍ곽세연 기자(ihpark@heraldm.com)



[대표적 문화시설]-남산 산책로ㆍ국립극장 연중 '문화의 향기'

   장충동에 위치한 호텔과 사교클럽, 레스토랑들은 남산을 옆구리(?)에 끼고 있는 입지적 장점을 십분 살린 것이 특징이다. 특히 연중 다양한 공연을 선보이는 국립극장에는 호젓한 산책길과 쉼터가 잘 조성돼 찾는 이가 많다. 지하철 동대입구 역에서 국립극장을 잇는'무지개길'과 느티나무 아래 빙 둘러진 나무벤치가 있는 '무지개쉼터', 남산 산책로와 맞닿은 '은하수쉼터' 등이 그것. 공연 관람차 극장을 오가는 관객은 물론, 인근 주민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국립극장 해오름극장(대극장) 지하에 위치한 궁중음식점 '지화자'는무형문화재 황혜성 선생이 직접 운영해 정갈한 맛이 일품이다. 또 장충동의 멤버십클럽인 '서울클럽'도 장영자 부부 등 유명 인사들이 즐겨찾는 고급 클럽으로 그 명성이 자자했다. 그러나 장충동의 명물은 뭐니 뭐니 해도 신라호텔. 이곳의 중식당 '팔선'은 장안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의 단골식당으로 유명하다. 정객 권노갑 씨가 이곳에서 프랑스 와인 '탈보'를 반주 삼아 일품요리를 즐겨 먹은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또 프랑스 레스토랑 '라 콘티넨탈', 피트니스 클럽도 상류층이 즐겨 출입하는 명소다.

    한편 신라호텔 영빈관과 그 뒤뜰(후정)도 쟁쟁한 인사들의 파티장소로인기가 높다. 아름다운 잔디와 고풍스러운 한옥이 잘 어우러져 찾는 사람마다 '나도 이곳에서 파티 한 번 열었으면'하는 마음이 절로 일게 한다. 신라호텔은 로비 연회장 식당에 걸린 그림도 국내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한때 홍라희 삼성미술관장이 로비에 걸린 그림을 직접 챙겼을 정도로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 또 호텔 뒷동산 산책로에도 조각 70여점이비치돼 투숙객은 물론 주민들로부터 인기가 높다. 2㎞에 달하는 이 조각공원은 특히 외국인 투숙객들로부터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이영란 기자lee@heraldm.com)











평창ㆍ구기동/도심 속 산골마을…권력층들의 안식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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