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제희의 풍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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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복지지의 땅, 구례 - 구례의 지명유래, 지리적 특징, 한국전쟁과 빨치산

구례 역사적 고찰

     [구례의 지명 유래]
     전남의 북동부와 지리산의 남서방 기슭에 위치한 구례군(求禮郡)은 백제 때에 구차례(求次禮)현이라 불리고, 신라 경덕왕 때에 구례현으로 고쳐 불리었으며 곡성군에 속하였다. 고려 초는 남원부에 속했다가 인종 때에 감무가 파견됨으로써 비로소 주현으로 승격되고, 말기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석주관을 축성했다. 토지면의 석주관은 마한과 진한의 경계 혹은 백제와 신라의 경계였다는 설이 전해진다.

     조선의 태종 때는 현감이 파견되고, 그 후 역모사건에 연루되면서 남원부에 속했거나 다시 현으로 복구되기를 반복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가옥이 137호이고, 인구는 677명이라 기록되어 있어 매우 작은 현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대를 기준하면 작은 아파트 단지에 불과한 가구와 인구에 불과하다.

     〈바닥이 깊고 물길이 좋으며 기름진 땅〉을 뜻하는 '고래실'을 전라도의 사투리로 표현하면 '구레실''구레논''구렛들'로 구례는 그런 의미를 내포한 말이다. 왜냐하면 전남·전북·경남의 경계를 이룬 삼도봉(三道峰)을 꼭지로 삼아 흐른 섬진강을 감싼 구례는 산흙이 흘러내려 기름진 '구레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택리지』에서도 구례 땅은 비록 들은 좁지만 농산물의 수확은 많고, 골짜기 물이 마르지 않고 흘러가니 가뭄타는 일이 적은 곳이다라고 하였다.

     구례는 지리산에서 가지친 해발 1,000m 가까운 험준한 산들이 사방을 감싸안은 그 안쪽에 자리한 분지에 해당되어 평야가 적다. 하지만 군의 중앙을 남류하는 서시천이 섬진강에 합류하면서 서시천의 양쪽 사면과 섬진강과의 합수점 부근에 비교적 넓은 평야가 자리잡았다. 하지만 군의 80%는 산지로 주산물은 구례분지 중심의 곡물과 원예작물이고, 근래에는 밤의 생산도 많고 산수유는 전국 최대의 주산지이다.

     [구례의 역사 인물]
     곽영은 임진왜란 때에 석주관에 축성하였다.

     담양의 의병장 고광순은 1906년 을사조약에 분개하여 구례와 지리산을 중심으로 일제와 싸우다가 연곡사에서 순절하고, 또 유병기는 광주의 김태원, 광양의 백낙구 등과 함께 항일의병활동을 펼쳤다.

     황현은 광양 출신이나 1908년 광의면 방광리에 호양학교를 세워 교육에 힘쓰다가 1910년 경술국치의 소식을 듣고 순절하였다. 그의 《매천야록》은 귀중한 사서로 평가받으며, 광의면 수월리에 매천사를 지어 배향하고있다.

     박경현은 3·1운동 때에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구례의 역사적 아픔]
     정유재란 때는 왜군의 진격로에 해당하여 구례의 구만들은 엄청난 피해를 입어 이 때에 수 백의 의병이 전사하였다. 이 때 왜적을 방어하다가 순절한 7명의 의사를 기리는 칠의단이 1868년(고종 5)에 건립되었다.

     조선 관군은 남원에 진을 치고, 왜군은 구례를 통해 물자를 운송했는데, 왕득인이 의병대를 결성하여 석주관을 지나가는 왜병에게 타격을 입힌 다음 전사했고, 아들인 왕의성도 의병을 일으켜 화엄사 스님 153명과 함께 석주관에서 60여 명의 왜병을 죽였다. 이 싸움에서 이곳의 내는 피로 물들으며 피내골(血川谷)이란 별칭이 붙고 오늘날 연곡사 계곡을 '피아골'이라 부르게 된 것도 이 역사적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구례에서 역사적 상처를 가장 크게 받은 곳이 토지면이다. 토지면은 지리산과 백운산이 가까워 여순 반란 때에 반군의 주 거점이 된 장소이고, 한국 전쟁 때도 빨치산의 주무대가 된 곳으로, 이들을 토벌키 위한 정부군이 투입되면서 엄청난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입었다.

     파도리 371사건
     구례의 토지 사람들은 1948년부터 공비토벌작전이 끝나던 1955년까지 7년의 세월을 전쟁 속에 보냈다. 이것은 지리산이 전쟁 때에 피신하기도 유리하기만, 패잔병의 은둔하기도 유리한 지형이기 때문이다. 토지면의 파도리 일대에는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층이 많았고, 사회주의적 이상세계를 추구한 사람도 많았다. 이들은 1947년 3월 1일 '사회주의해방만세대회'를 추진했는데, 이 대회는 경찰에 의해 개최가 봉쇄되었다. 그러자 파도리 주민들은 청년단의 주도 아래서 대회장으로 가는 길을 터줄 것을 요구하면서 실랑이를 벌렸다. 그 와중에 23명의 주민이 죽는 불상사가 일어났고, 이것을 '파도리 3?1사건'이라 부른다.

     여순반란과 문수골
     1948년 일어난 여순반란사건'은 1,200여명이 죽고, 1500채의 집이 불탔다. 이 사건은 여순에 주둔한 국군 제 14연대에서 북조선에 동조하는 좌익계열의 장병들이 인민해방군에 의한 남조선해방을 선동하면서 일으킨 반란이다. 여수에서 관공서를 점령한 반란군은 곧 순천의 좌익 민간인과 학생들의 합세하여 그 세력이 매우 커졌다.

     하지만 군경찰에 의한 진압작전이 개시되어 반란군은 쫒기는 신세가 되고, 그 일부가 구례의 문수골로 숨어들었다. 군경찰은 구례 역에 차단 막을 치고 대대적으로 공격을 가했는데, 반란군은 결국 1년 반만인 1950년에 완전히 소탕되었다. 지금도 문수골에는 당시 반란군이 숨어살던 참호가 남아있다. 토지 주민들은 밤이면 반란군이 마을로 내려와 총뿌리를 겨눈 채 밥을 달라거나 식량을 운반해야했고, 낮이 되면 군경들이 반란군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매를 때리거나 고문을 가해 억울한 피해가 많았다.

     한국전쟁과 빨치산의 피해
     한국 전쟁이 일어나고 구례에 북한군이 들어온 것은 7월 25일이고, 2개월 뒤에 국군이 토지면사무소와 지서를 수복했으나, 지리산에 숨어든 빨치산과 국군과의 치열한 전투는 한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와중에 국군은 토지면의 산간에 사는 민간인들을 강제로 이주시킨 다음 집에는 불을 질렀다. 졸지에 집을 잃은 민간인들은 토지면으로 내려와 남의 집에 얹혀 살게되고, 일부는 현역에 동원되어 전투를 벌리거나, 또는 청년단에 가입시켜 지서나 면사무소를 지키게했다. 이 사람들은 여러 차례의 빨치산과의 전투에서 많은 희생자가 속출했다.



구례 지리적 특성

     [섬진강으로 분할된 구례 땅 ]
     구례는 섬진강을 중심으로 북부와 남부를 이룬 땅의 지맥이 확연히 다른 곳이다. 구례읍이 위치한 북부는 백두대간의 종점인 지리산의 기맥이 남진하면서 형성한 분지에 위치한다. 노고단에서 형제봉으로 뻗어가 월령봉으로 남진한 용맥을 경계로 토지면과 마산면이 구분되고, 마산면의 북서방에는 광의와 산동면이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구례읍은 서시천에 의해 지맥이 끊였으니, 백두대간의 만복대에서 서진한 용맥이 밤재를 넘더니, 곧 몸을 남진시켜 견두산→천마산→깃대봉→형제봉→천황봉으로 솟고, 몸을 다시 동진과 남동진시켜 섬진강과 사시천의 합수점을 향해 뻗어온 용맥에 자리잡았다. 따라서 섬진강 북쪽의 구례 땅은 지리산을 조상으로 삼아 형성된 지형이면서, 서시천의 동쪽과 서쪽의 땅은 촌수가 약간 먼 지세이다.

     섬선진 남쪽의 문척·간전면은 지리산하고는 전혀 다른 곳에서 뻗어온 용맥위에 자리잡았다. 한반도의 중심 뼈대를 이룬 백두대간은 영취산에서 금남호남정맥을 출맥시켜 장수·진안의 땅을 이루고, 다시 주화산에서 호남정맥을 낳아 전북 남부와 무등산을 거쳐 장흥의 사자산까지 남진하더니, 곧 몸을 북동진시켜 보성→벌교→승주를 거쳐 구례 남부의 백운산으로 우뚝 솟고, 하동에서 섬진강을 만나 긴 여정을 마친다.

     따라서 문척·간전면은 지리산이 아닌 백두산→영취산→주화산→무등산→사자산→조계산→백운산으로 이어지는 호남정맥에 위치한 마을이다. 따라서 태조산은 주화산이고 사자산이 중조산이고 백운산이 소조산으로 비록 구례 땅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나, 지형을 이룬 지맥만큼은 매우 다른 특징을 보인다.

     [구례의 명산들]
     노고단(1507m)
     노고단은 천왕봉, 반야봉과 함께 지리산의 3대 주봉이다. 지리산 종주의 시작점이 되며 북쪽에는 심원계곡을, 남쪽에는 화엄사 계곡과 문수 계곡, 피아골 계곡에 물을 보태는 봉우리이다. 노고단 산자락의 끝에는 화엄사가 자리했다. 성삼재를 넘는 관광 도로가 열린 뒤, 노고단은 '한국의 알프스'로 불리우며 고산 휴양지로써 떠올랐다. 노고단은 신라의 화랑들이 심신을 수련했던 곳이고, 그곳에서 바라다보이는 섬진강과 운해 그리고 한 여름의 원추리 군락도 볼만하다.

     왕시루봉(1243m)
     노고단에서 토지면을 향해 뻗어내린 능선의 정점으로, 산 위가 펑퍼짐하고 두리뭉실하여 마치 큰 시루를 엎어놓은 것과 같다하여 왕시루봉이라 부른다. 산 아래로 섬진강이 흐르고 백운산이 마주보이는 경관이 수려하다. 봄에는 철쭉이, 가을에는 억새밭이 장관이다.

     차일봉(1008m)
     노고단과 자매봉을 이룬 채 솟아난 차일봉은 모양이 마치 차일을 쳐 놓은 것 같아 붙여진 이름이다. 우번대, 종석대, 관음대 등 여러 이름을 갖지고, 정상에는 암봉이 솟아 자연 전망대를 이룬다. 차일봉 남쪽에는 상선암이란 이름난 선원이 있었다. 신라의 우번조사가 상선암을 찾아 3년 간이나 수도를 했다.

     그러던 봄날에 한 여자가 암자에 나타나 우번을 유혹했다. 여인에게 흘린 우번은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서 여인의 뒤를 따라갔는데, 그 여인은 아름다운 숲을 지나쳐 자꾸만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우번도 정신없이 쫒아가니 어느덧 차일봉 정상이 나타났고, 우번을 유혹한 여인 대신에 관음보살이 나타나 우번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번이 자기의 어리석음을 뉘우치니 관음보살은 간데 없고 대신 큰 바위만 우뚝 서 있었다.

     우번은 그 바위 밑에 토굴을 파고 수도하여 후일 큰 스님이 되었다. 우번이 도통한 토굴을 우번대라 부르고, 우번이 도통하던 순간에 석종 소리가 들렸다하여 종석대라
부르고, 관음보살이 서있던 자리를 관음대라 부른다.

     오산, 542m
     산의 형태가 자라 모양으로 생겨 오산(鱉山)이라 부르는데, 산위에는 도선, 원효, 의상, 진각 등의 스님을 모셨다는 사성암(四聖庵)이 있다. 바위 틈새에 샘물이 고여있고, 정상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일품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오산에 대해 〈구례현의 남 15리에 있다. 산마루에 바위 하나가 있고 바위 틈에 빈틈이 있어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세상에 전하기를 도선(道詵)이 일찍이 이 산에 살면서 천하의 지리(地理)를 그렸다 한다.〉라고 기록하였다.

     오봉산, 209m
     오봉산(五鳳山)은 문척면에서 섬진강을 따라 가로로 누운 다섯 봉우리의 산이다. 이곳에는 오봉귀소형(五鳳歸巢形)의 큰 명당이 있다고 전해지는데, 특히 다섯봉 중 맨 동쪽 봉우리에 그 생기가 집중되었다고 한다. 예로부터 아들을 점지받기 위해 부녀자들이 앞을 다퉈 답산하였다.

     [구례의 섬진강과 서시천]
     섬진강
     산이 높으면 물도 맑고 깊다. 지리산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휘감은 다음 남해에 이르는 섬진강(蟾津江)은 물이 맑고 푸르러 한 폭의 파란 비단을 펼쳐 놓은 듯 아름답다. 강 양쪽에 펼쳐진 백사장도 하얀 명주천을 깐 듯 아름다워 예로부터 섬진청류(蟾津淸流)는 지리산 10경의 하나가 되었다.

     진안에서 발원하여 남해의 광양만으로 흘러들며, 금남호남정맥과 호남정맥 그리고 낙남정맥이 둥글게 감싸안은 그 안쪽을 흐르며 젖줄의 역항을 한다. 고려 우왕 때, 왜구가 삼진강 하구로 침입해 왔을 때이다. 수많은 두꺼비떼가 울부짖어 겁을 먹은 왜구는 광양쪽으로 피해갔다는 전설이 있고서 〈두꺼비 섬 蟾〉자를 붙여 섬진강이라 불렀다.

     택리지에 따르면 섬진강을 따라 구례까지 수운이 통했음을 알 수 있고, 강 양쪽에는 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졌다. 하지만 지류와의 합류 지점에는 한량기에 이동된 암괴(巖塊)가 하천 침식에 의해 노출되면서 바닦에는 바위가 많다.

     서시천(西施川)
     구례의 북쪽인 산동면 위안리에서 발원한 물로 구례를 남북으로 관통한 다음 섬진강으로 흘러든다. 진나라 시황제의 사신으로 불로초를 캐러왔던 서시(西施)가 童男童女 200명을 데리고 이곳을 지나갔다는 전설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 하천은 계월천, 둔기천, 무은천, 백련천등 여러 하천을 지류로 삼고, 군의 경지는 대부분 이 하천 유역에 자리잡아서 구레의 실제적인 젖줄 역할을 한다.

     [구례 땅과 사람의 조화]
     「택리지」의 살만한 땅에 부합된 고장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살만한 곳을 선택하는데 먼저 地理를 손꼽았다. 지리란 풍수학적인 산천지형을 말하며, 먼저 水口를 보고, 들의 형세를, 산의 모양을, 흙빛을, 물의 흐르는 방향과 형세를, 앞산과 앞물을 차례로 본다고했다. 그리고는 수구가 엉성하면 많은 살림도 여러 대를 이어가지 못하고 저절로 없어진다고 하였다. 구례는 서쪽에서 흘러온 섬진강의 큰 물이 서북쪽에서 흘러온 서시천을 맞이한 다음 동쪽으로 좁은 수구를 통해 빠져나가는 서류동출(西流東出)의 지형이다.

     한반도의 물 줄기가 대체로 동류서출하는 것과는 반대로 흐르니, 일단 역행의 기운에 의해 산천에 강한 기가 응집될 조건이 갖춰진 곳이다. 좁은 수구가 부지의 내외를 격리시키고, 안쪽에는 들어서면 확트인 경관이 넓게 자리잡아 별천지같은 느낌을 준다. 또 사방으로 산들이 에워쌌으니 땔감과 맑은 물을 얻기가 쉽고, 북쪽과 서쪽의 험준한 산맥은 차가운 북서풍을 막아준다. 들은 비록 작지만 산흙이 쌓인 다음 물이 풍부하니 토양은 비옥하다. 앞쪽으로 낮고 높은 산이 층층이 수려한 자태를 자아내고, 앞쪽으로 넓은 강이 마주하니,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길지이다.

     「택리지」는 사람이 살만한 곳의 조건으로 생리(生利)를 꼽았다. 즉, 경제적 이득을 얻기가 쉬운 곳을 말하며, 재물이란 하늘이 내리거나 땅에서 솟는 것이 아이고 기름진 땅이 첫째이고, 배와 수레를 이용하여 물자를 교류시킬 수 있는 곳이 다음이다.

     구례는 섬진강을 따라 남해에서 배가 드나들던 곳으로, 구만들의 지명 중에 '배치재'와 '배틀재' 또는 파도리에서 보듯 마을 앞까지 돛단배가 드다들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택리지』에서 구만촌은 시냇가에 위치하여 강산 토지와 거릇배를 통해서 얻는 생선·소금의 이득이 있어 가장 살 만한 곳이라고 했으니, 구례는 경제적 이득을 얻는 생리적 측면에서도 으뜸의 고장이다.

     다음으로 「택리지」가 꼽은 살만한 곳은 인심과 풍속이 좋은 곳이다. 지리산의 노고단은 오악(五岳)중 남악(南岳)에 해당하여 곡우제를 통해 그 해의 풍작과 백성의 안녕을 빌던 곳이다. 이 때는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몰려 인산인해를 이루니, 구례의 풍습은 예를 숭상하고 인심이 후덕하면서 유순하기로 소문이 높다.

     「택리지」가 마지막으로 꼽은 살만한 곳은 산수가 좋은 곳이다. 집 근처에 유람할 만한 산수가 없으면 정서를 함양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구례는 몇 발자국만 걸으면 곧 명산과 계곡이 수려하니, 마음내키는대로 시름을 풀고 오기가 적당한 고장이다. 특히 유제양은 문수천을 즐기며, "이 내가 아닌 다른 내는 내라 할 수 없다"라 말하며 [他不川]란 글자를 바위에 새겼다. 그럼으로 구례는 사람이 살 만한 땅으로 전혀 부족함이 없는 길지로, 그래서 에로부터 완벽하게 복받은 땅이란 뜻으로 {완복지지(完福之地)]로 불렸다.

     [구례의 기후와 토양]
     구례지방의 연평균 기온은 13℃쯤 되고 연강수량은 1,300mm가 넘을 때가 많다. 가장 추운 1월의 평균기온은 0℃이고, 가장 더운 달인 8월 평균기온은 25.8℃ 정도이다. 1972년부터 1994년까지 가장 추운 해는 1977년으로 1월 평균기온 -2.8℃, 최저기온 평균은 -6.8℃였다. 가장 추운 날 극한점은 1994년 1월 24일 -12.7℃를 기록했다. 가장 더운 해는 1989년 7월 평균기온이 29.8℃, 최고기온 평균은 36.3℃였으며, 가장 더운날 극서점도 같은 해 7월 24일에 기록된 40.6℃였다.

     강수량의 경우 해마다 심한 편차가 났다. 1988년의 경우는 703.5mm인데 비해 그 다음해인 1989년에는 2,221.5mm를 나타낸 적도 있다. 이해 7월 한달 동안 무려 788.4mm나 내렸고, 8월에도 510mm,를 기록했다. 1972년부터 1991년까지 평균해보면 년 1,374mm인데 6,7,8월 세달 동안 내린 강우량이 789mm로 57.4%를 나타내 9월분까지 합하면 60%이상이 여름철에 집중된다고 볼 수 있다.

     여름에 비를 몰고오는 남동계절풍의 영향으로 구례분지 안에서도 남동풍을 막아주는 백운산 북록인 문척면은 간전면과 함께 토지, 마산, 광의, 산동면 등 지리산 남록 지역에 비해 여름 강수량이 적은 편이다. 그러나 겨울철에는 북서계절풍이 바로 들어오기 때문에 눈이 많이 내린편이다. 오산의 사성암은 해발고도가 500mm가 넘어 겨울에 평지보다 평균 5℃ 정도 낮을 것이며, 중산리와 토금리도 지대가 높아 1∼2℃ 정도 낮을 것이다. 겨울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이 산골마을 사람들은 장작을 마련 땔감으로 삼기위해 집안 곳곳에 쌓아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여름에는 반대로 기온이 좀 낮을 것으로 여겨진다.

     구례의 기후를 살펴보면, 겨울에 춥지않고, 여름에는 시원하며, 강우량은 많은 지역에 속한다. 겨울이 춥지 않은 것은 사방에서 산이 에워싸 북서풍을 막아주고, 나아가 구례가 지리산 남서면에 자리잡아 일조량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또 여름이 시원한 것은 울창한 숲이 미기후를 조절하면서 손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계곡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려 더위를 식혀준 결과이고, 강우량이 많은 것은 여름의 남동풍이 대륙쪽으로 불어오면서 높은 지리산을 넘지 못한 채 푀엔(Fohn)형상을 일으키며 다량의 수증기를 비로 내리기 때문이다. 구례의 땅은 어떤 가뭄에도 논이 매마른 적이 없다고 전하며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편안 마음으로 생업에 종사하니 이래저래 사람이 살만한 땅으로 적당하다.

[사진 : 구례의 명산, 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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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복지지의 땅, 구례 - 구례에 명당이 많은 이유, 양택 명당 운조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