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송도삼절(松都三絶)
세상에서 송도삼절(松都三絶)하면, 중종 때의 학자 화담(花潭)과 황진이(黃眞伊) 그리고 박연폭포를 들지만, 이것은 황진이가 자기를 내세우기 위하여 지어낸 것이고, 진짜 송도삼절은 차천로(車天輅)의 한시(漢詩), 한호(韓濩)의 글씨, 그리고 최입(崔岦)의 문장을 말한다. 과천시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고속화도로 오른쪽에는 응봉(鷹峰, 348m)이 있고, 그 산 아래로는 문원동이 있다. 이 마을에서 오른쪽으로 작은 내를 건너 응봉에 오르면 중턱에 오산의 유택이 있다. 차천로(車天輅, 1556~1615)는 송도에서 식(軾)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자는 복원(復元), 호는 오산(五山)․귤실(橘室)․청묘거사(淸妙居士)이다. 일찍이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 학문을 쌓아 1577년 알성 문과에 병과(丙科)로 합격하고 개성 교수(敎授)를 지내다, 1583년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여 문재를 떨쳤다.
오산이 어렸을 때에는 집이 매우 가난하였다. 하루는 밭에서 일을 한 뒤 형과 밥을 먹는데, 다리에 묻은 흙도 깨끗이 닦지 않고 밥상 앞에 앉았다고 형에게 꾸중을 들었다. 이 광경을 지켜본 부인이 밤이 되자 시집 올 때 가져온 패물을 주며 말하기를, ꡒ10년 기약으로 공부를 하여 입신양명(立身揚名)한 후 집으로 돌아올 것을 약조하세요. 만약 그 안에 출세하지 못하고 돌아오면 죽음으로 맞이 할 것이요.ꡓ 하였다. 한양에 올라온 오산은 성균관 집사를 통하여 어렵게 성균관에 들어 가 공부를 하였다. 부인과의 약속 때문에 설날이 되어도 고향에 가지 못하고 혼자 성균관에 남아 글 공부만 하고 있는데, 하루는 임금이 미복잠행(微服潛行)하여 성균관에 들리니 한 선비가 열심히 글을 읽고 있어 자신을 남산골 샌님’이라 속인 뒤 대화를 나누었다. 그 후 몇 번 더 오산을 만나 인품과 재주를 시험한 임금은 하루는 병풍을 건내며 그 곳에다 시를 한 수 써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자 오산은 일필지휘로 시를 써서 주었다. 시를 받은 ‘남산골 샌님’은 이번에 과거 시험이 있을 것이니 꼭 함께 응시하자고 다짐 하였다. 오산이 알성시 과장에 나갔으나 만나기로 한 ‘남산골 샌님’이 보이지 않아 혼자서 과장(科場)에 들어갔는데, 다행스럽게도 과제(科題)가 ‘병풍’이어서 예전 ‘남산골 샌님’에게 써 준 시를 다시 써 제일 먼저 제출하였다. 드디어 급제자를 알리는 방(榜)이 나붙어 오산은 병과(丙科)에 합격하니 곧 임금을 알현하게 되었다. 멋 모르고 임금을 뵈니 ‘남산골 샌님’이 바로 임금인지라 오산은 그 동안의 무례함을 충심으로 빌었다. 그러나 임금은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오산의 손을 잡고 칭찬하였으며, 그 뒤 오산은 어사화를 쓰고 금의환향 하였다.
한때 오산은 정자(正字)로서 고향 사람인 여계선(呂繼先)이 과거를 볼 때 표문(表文)을 대신 지어 장원급제를 시킨 일이 발각되어 명천(明川)에 유배된 일도 있었다. 과거장에서 남의 글을 표절하거나 보고 적는 것은 법으로 엄히 막았는데, 당시에는 이러한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명종 때 이정빈(李廷賓)이란 자는 과거 공부도 하지 않고 남의 글을 베껴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을 하였으나, 소문이 퍼져 마침내 관직을 삭탈 당한 일도 있었다. 명천에 유배된 오산은 문재(文才)를 아끼는 사람들에 의하여 풀려 나와 1589년 통신사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일본을 다녀 오고, 이어 1590년에도 일본을 다녀왔다. 오산은 백가서(百家書)에 통달하여 학식이 풍부하고 성격이 호방하였다.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 문서를 작성할 때도 한 번 지은 문장은 고치지 않았고, 아무리 어지럽게 쓴 원고일지라도 지은 뒤에는 광주리에 던져 두고 꺼내 보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은 평양에서 왜군을 격퇴하고, 이어 벽제관에서 패한 뒤 그 해 가을 명나라로 돌아가며 여러 문사(文士)에게 이별시를 구하였다. 이 때 율시 100수(首)는 2일만에 짓고, 배율시(排律詩) 100운은 한나절만에 지어 주었는데, 그 시재가 풍부하고 심오하여 당대에 따를 자가 없었다 한다. 오산의 시 중에는 중국 당나라의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유종원(柳宗元)의ꡐ강설(江雪)ꡑ과 비교되는ꡐ강야(江夜)ꡑ라는 시가 있다.
고요한 밤 고기잡이 등불만이 깜박이고 (夜靜魚燈釣)
잔잔한 물결에 달빛만 배에 가득하다 (波淺月滿舟)
남쪽으로 날아가는 외로운 기러기 소리 (一聲南去雁)
가을 짙은 바다와 산을 울며 가는가 (啼送海山秋)
벼슬에 큰 뜻을 두지 않은 오산은 명산대천을 유람하며 유유자적하게 살다가, 1601년 교리(敎理)로 교정청(校正廳)의 관직을 겸임하고, 광해군 때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을 지내고 세상을 떠났다. 뛰어난 오산의 문장은 명나라에 까지 알려져 동방 문사(東方文士)라는 칭호를 받았고, 현재도ꡐ오산집(五山集)ꡑ이 전한다.
중국이 놀란 시재(詩才)
당시는 왜란으로 명나라의 사신이 자주 조선을 찾아 왔다. 조정에서는 그 사신을 흡족하게 접대하여야 군사 협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항시 노심초사 하였다. 한번은 중국에서도 이름 난 시인이 사신으로 온다고 하자 조정에서는 대적할 조선의 문장가를 찾았다. 그러자 오산이 그 일을 자처하여 압록강까지 그 사신을 맞으러 간 일이 있었다. 압록강 나루터에는 사신을 맞이하기 위하여 차일(遮日)이 쳐지고, 삼현 육각(三絃六角)에 기생까지 동원하여 그를 맞이 하였다. 이 때 오산은 강 저쪽에 온 사신을 이 쪽으로 모셔 오는 뱃사공으로 변장하였다. 이윽고 배에 오른 사신은 강에서 노니는 오리를 보자 시흥(詩興)이 돋아 시 한 수를 읊었다.
잠겼다 나타나고, 잠겼다 나타나고 잠겼다 잠겼다 다시 다시 나타나는 것은 물 속의 오리요 (潛復出 潛復出 潛潛復復出 水中之鳧)
라고 즉흥시 한 짝을 읊었다. 그러나 한 쪽 시만 읊어 놓고 그 다음 댓구가 머리에 떠오르지 않자 혼자 끙끙 앓고 있었다. 그러자 뱃사공 오산은 유유히 노질을 하면서 그 댓구를 놓았다.
날았다 앉고, 날았다 앉고 날았다 날았다 앉고 앉고 하는 것은 꽃 가운데 새로다 (飛上下 飛上下 飛飛上上下 花間之鳥)
오산의 멋진 댓구를 들은 사공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대문호로 자처하는 자기가 댓구를 찾지 못하여 끙끙 앓고 있는 판에 조선의 일개 뱃사공이 멋지게 답을 하였기 때문이다. 약이 오른 사신은 이 번에는 급하게 시를 읊었다.
푸른 하늘에는 별과 달이 종종하다 (靑天星月從從)
라고 읊자, 오산은 다시,
먼 마을에는 닭과 개가 흥흥거린다 (遠村鷄犬興興)
라고 화답하였다. 그러자 그 사신은 의기가 양양하여 말하기를,
ꡒ개는 흥흥거리나 어찌 닭이 흥흥하는고?ꡓ
하며 역시 작은 조선에 인물이 있겠느냐고 조롱하였다. 그러자 오산은 사신에게 이르기를,
ꡒ별은 종종하나 어찌 달이 종종합니까?ꡓ
라고 되물었다. 이치에 합당한 질문에 사신은 분노가 치밀었다. 자세히 보니 오산의 한 눈이 감긴지라,
새가 사공의 눈을 쪼았구나 (鳥啄亭長目)
하였다. 모욕을 당한 오산이 사신을 살펴보니 코가 매우 낮았다.
바람이 불어 사신의 코를 쓸어 갔네 (風吹上使鼻)
하였다. 그러자 사신은 덥석 오산의 손을 잡더니, ꡒ어찌 당신같은 대 시인이 뱃사공을 하는가?ꡓ 라고 물었다. 그러자 오산은, ꡒ비록 조선은 작은 나라지만 한양은 천하의 문장가로 가득 차 소인같은 실력으로는 뱃사공 노릇밖에 못합니다.ꡓ 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사신은 기가 질려 글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못하고 조선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었다 한다.
선조 때 명(明)나라 주지번(朱之蕃)이 사신으로 조선에 오게 되었다. 그의 뛰어난 문사(文詞)와 시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지라, 조선에서도 시문에 뛰어난 사람을 뽑아 그를 접대하고자 하였다. 이에 조정은 당시 문장으로 이름 난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를 접반사(接伴使)로,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을 연위사(延慰使)로 뽑아 그를 맞이 하였다. 사신 일행이 평양에 이르고 저녘이 되자 주지번은 송도(松都)를 회고하며 오언율시 1백운(韻)을 보내어 날이 새기 전에 시를 지어 올리라 하였다. 이에 월사(月沙)가 여러 사람과 의논하니 어떤 자는 밤이 짧다고 하고, 어떤 자는 여러 사람이 나누어 짓자고 하였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나누어 시를 지을 경우 빨리 지을 수 있으나 문맥이 서로 통하지 않을 것이니 진퇴양난이었다. 그러자 혼자서 그 많은 시를 지을 수 사람은 오직 오산 밖에는 없다고 생각하고 월사는 곧 오산을 불러 시를 짓도록 하였다. 그러자 오산이 말하기를, ꡒ한동이의 술과 큰 병풍 한 개, 그리고 한석봉(韓石峰)이 없으면 불가합니다.ꡓ 하였다. 월사가 그대로 준비를 하여 주자, 오산은 마루에 병풍을 치고 이어 술을 십여 잔 마시고는 병풍 안으로 들어갔다. 병풍 밖에서 한석봉이 종이 와 붓을 준비하자, 오산은 서진(書鎭)으로 장단을 맞추며 이르기를, ꡒ내가 소리를 부를 것이니 경홍(景洪)은 받아 적으라ꡓ 말한 뒤 한쪽에서는 부르는 소리가 진동하고 한쪽에서는 일필지휘로 받아 적어 날이 새기도 전에 1백운(韻)의 시를 모두 완성하였다. 다음 날 아침에 주지번은 촛불을 밝히고 오산이 지은 시를 읽다가, 너무 흥에 겨운 나머지 반도 채 읽기 전에 장단을 맞추던 쥘부채가 부숴졌으며, 읊는 소리가 대문 밖까지 울려 퍼졌다 한다.
오산의 유택
새매를 닮은 응봉(鷹峰) 아랫 마을에는 밤나무가 많아 꿀벌을 기르고 민가 앞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산을 돌면 묘 한 기가 그 끝에 있다. 이 묘는 오산 후손의 가묘(假墓)인지 묘비 대신 기념비가 서 있고, 오산의 묘는 그 윗쪽에 모셔져 있다. 청계산이 마주보이는 북향에 자리 잡은 유택은 뒷쪽으로 잔디가 많이 손상되었고, 큼직한 북석 위에 상석이 놓이고, 앞에는 오석 비신에 화강암 옥개석을 얹은 묘비가 서 있으나 오래되지 않은 듯하다. ꡐ五山延安車公天輅之墓ꡑ라 쓰인 묘비 양 옆엔 문인석이 있고, 그 앞에는 망주석이 있다. 묘 오른쪽엔 고압선을 지탱하는 철주가 있어 한적한 멋은 없고, 그 문장과 업적에 비하여 벼슬이 낮았던 일로 그 흔한 지방 문화재 지정도 받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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