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 방면으로 43번 국도로 조금 내려 오면 곧 316번 국도와 만나게 된다. 내촌면 방면으로 좌회전하여 주유소를 지나고 보신탕을 파는 식당이 많은 지점에 이르면 가산면 금현리로 가는 길이 나온다. 금현리는 무슨 연유인지 보신탕을 파는 식당이 많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묘와 사당은 금현리 마을을 지난 왼쪽 야산에 있다. 길 가 옆에는 신도비가 있는데, 네모난 기단 위에 화강암 비신을 세우고 위에는 팔작지붕을 얹었다. 아직도 글자는 식별이 가능하고, 신도비 옆의 사당은 돌이 박힌 흙담으로 둘리어 소탈하였던 생전의 모습이 연상된다.
명재상으로 이름 난 백사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가장 뛰어난 명재상으로 꼽힌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백사(白沙)이다. 고려의 대학자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참찬을 지낸 이몽량(李夢亮)이다. 백사는 태어나서 이틀이나 젖을 먹지 않고 사흘이나 울지 않았다. 집안 사람들이 걱정이 되어 점을 쳐 보았더니, 점장이는 축하하며 말하기를, “근심할 것 없습니다. 마땅이 매우 귀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과연 6세에 이미 총명함과 영리함이 남보다 뛰어났는데, 하루는 아버지가 칼과 거문고로 글을 지으라고 하자, 칼은 장부의 기상을 가졌고(劒有丈夫氣) 거문고는 천고의 음을 간직하였구나 (琴藏千古音) 라고 글을 지어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항복은 죽마고우(竹馬故友)인 이덕형(李德馨)과 어울러 기지(機智)를 부리며 장난을 하여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15세가 되었는데도 글은 읽지 않고 소년들과 어울려 놀기만 좋아하였다. 어머니 최씨(崔氏)가 이를 알고 눈물을 흘리며 식음을 전폐하자, 백사는 그 뜻을 알아차리고 이 때부터 학문에 힘썼다 한다.
1571년 16세에 어머니 마저 세상을 떠나자, 백사는 3년상을 마치고 성균관에 들어가 힘써 학문에 열중하였다. 뒤에 권율(權慄)의 사위가 되고, 25세에 알성 문과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가 되었다. 이 때 함께 급제한 사람으로 이덕형(李德馨)․이정립(李廷立)이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삼이(三李)라 일컬었다. 급제 후 이조 판서 이이(李珥)를 찾아 갔더니 그가 큰 그릇임을 알아보고 말하기를, “내가 돌아갈 뜻이 있으니, 자네 나를 석담(石潭)으로 찾아 오게” 하였다. 백사가 혐의를 염려하여 자주 가지 못하다가, 얼마 후 이이가 세상을 떠나자 선생은 평생을 두고 후회하였다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약 10여 년은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던 시절이다. 1583년에는 집에 머물며 공부할 수 있는 사가독서의 은전을 입었고, 그 뒤 옥당의 정자, 사간원의 정언을 지냈다. 1590년 호조 참의로 있을 때는 회계를 정밀히 살피고 비용을 줄이어, 한 달만에 창고가 가득 찼다. 이를 두고 판서 윤두수(尹斗壽)가 탄복하여 이르기를, “문사로서 능히 전곡(錢穀)까지 잘 처리하니 참으로 통재(通才)다” 하며 감탄하였다.
또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다룰 때 백사는 문사 낭청(問事郎廳)이 되었는데, 밝고 민첩하게 임금의 뜻에 맞게 일을 처리하자, “한편으로는 죄수를 문초받고, 한편으로는 그림자와 메아리처럼 빠르게 일을 처리하니 다른 사람이 미칠 바 아니다”라고 극구 칭찬하였으며, 다른 동료들은 감히 그런 대우를 기대할 수 없었다. 백사가 죄인들의 형을 결정할 때 그 억울한 것을 힘써 풀어주어 살아남은 자가 퍽 많았다. 이에 임금은 덧붙이기를, “참 기재(奇才)야, 기재” 하여 감탄하였다 한다. 모반 사건을 잘 처리한 공로가 인정되어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녹훈되고, 이듬해 사화(신묘년의 서인 축출)가 일어나 정철(鄭澈)이 죄인의 우두머리로 처분을 받기 위하여 한강에서 기다렸는데, 모든 사람이 자기에게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워 아무도 위문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백사는 좌승지의 신분으로 날마다 그를 찾아가 위문하니, 대관(臺官)들이 그도 함께 귀양 보내고자 하였으나, 대사헌 이원익(李元翼)의 적극적인 구원으로 진정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종묘 사직이 위태로울 때 정성을 다하고 절개를 다한 것은 오직 백사뿐이다. 충주에서 신립(申砬)이 패하였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선조는 의주로 떠날 차비를 차렸다. 백성이 알면 동요될까 염려하여 야밤을 틈타 궁전을 나셨는데, 어가를 따르는 관리는 몇 명되지 않았다. 임금의 어가가 사현(沙峴)에 이르자 날이 차차 밝아지고, 돌아보니 궁궐이 불타고 있었다. 임금을 잃은 백성들은 폭도로 변해 공사노비(公私奴婢) 문서가 있던 장례원(掌隷院)과 형조(刑曹)를 먼저 불태우고, 이윽고 내탕고에 들어가 금과 비단을 다투어 가져가고,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을 불태웠다. 또한 문무루(文武樓)에 있던 각종 서적과 춘추관(春秋館)에 있던 실록과 사초(史草)․승정원일기가 다 잿더미가 되었다. 어가가 석교(石橋)에 이르자 비는 더욱 심해지고 진흙탕에 빠져 뒤따르던 병사며 관료들은 도망가기 바빴고, 임금이 벽제(碧蹄)에 이르자 상하가 모두 젖어서 갈 수가 없었다. 대가가 마산역(馬山驛)을 지나자 어떤 사람이 밭두렁에 있다가 통곡하기를, “나라에서 우리를 버리고 가니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꼬.” 하였다.
임진강에 이르렀는데 비는 그치지 않고 상하가 모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칠흑같이 어두운 임진강을 건너기 위하여 화석정에 불을 놓아 임금만 간신히 홀로 배를 탔고, 호위하는 자도 없었다. 임금이 서행(西行)을 결심하고 대신을 둘러 보며 차례로 함께 갈 사람을 물으니, 백사가 가로되, “신은 나이가 젊고, 병도 없고, 또한 부모도 없으니, 대가를 따라 가겠읍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억지로 따라 갈 필요가 없다고 하자 다시 말하기 를, “벼슬을 시작한 처음에 이미 충성하겠다는 뜻을 가졌으며, 이번에 서울을 떠날 때 죽음을 각오하고 처자와 형․누이와 이미 영결(永訣)하여 이 뜻을 정한 지 오래입니다” 하였다. 이 때 임금의 서행을 따른 자는 원임대신(原任大臣) 정철(鄭澈)․유성룡 그리고 백사 등 모두 합하여 신하는 10여 명 이었으며, 백사가 대가 앞에서 길을 인도하였다. 이 때의 감회를 시로 읊기를,
창졸에 하늘도 믿기 어렵고 (倉卒天難恃)
임시라 계책이 묘할 수 없구나 (權宜策未工)
인심은 오히려 북극성을 바라보는데 (人心猶拱北)
말머리는 동으로 향하고자 하네 (馬首欲向東)
한 길로 가서 어데로 가는고 (一路去何去)
일천 산이 거듭이요 또 거듭이네 (千山重復重)
외로운 구름이 재〔嶺〕에 있으니 (孤雲在嶺嶠)
나는 너와 상종하리라 (吾與爾相從)
평양이 왜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명나라에서는 구원병을 보내주지 않자, 정주(定州)에 머문 행차는 몹시 불안하였다. 이에 이항복․이덕형 둘이 명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청하고자 임금에게 청하였으나 이덕형만을 보냈다. 막역한 사이인 백사가 전송을 하자, 이덕형은, “날랜 말로 길을 배(倍)로 하여 달리지 못함이 한이로다” 라고 하자 백사는 자신의 말을 풀어 주었다.
의주에 머물며 선조는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였으나, 명나라는 오히려 조선이 일본을 끌어 들여 명나라를 치려 한다고 난색을 표하였다. 이에 일본이 보낸 문서를 명나라의 장군에게 보여줘 오해를 풀었고, 1차로 보낸 조승훈(祖承訓)의 3천 병력은 곧 왜군에게 패하였다. 그러자 그는 사신을 보내어 대병력을 파견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고, 이윽고 이여송(李如松)의 대병력이 들어와 평양을 탈환하고 이어 서울을 되찾아 임금은 한양으로 돌아왔다. 다음해 세자(광해군)를 남쪽으로 보내어 분조(分朝)를 설치하고 경상도와 전라도의 군무를 맡아보게 하였는데, 그는 대사마(大司馬)로서 세자를 보필하였다. 이 때 전라도에서 송유진(宋儒眞)의 반란이 일어나자 여러 관료들이 환도를 주장하였으나, 백사는 반란군 진압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하여 이를 중단시키고 곧 진압하였다. 반란이 평정되자 세자는 홍주(洪州: 홍성)로부터 보령(保寧)으로 분조를 옮기려고 살펴 보도록 지시하였다. 백사가 돌아와 보고하기를 이주할 곳이 못 된다고 속여 말하였다. 이에 세자가 의심하자, “영보정(永保亭)의 경치는 충청도의 으뜸이라, 젊은 세자가 그 곳에 머 물면 혹시 사치하고 방탕한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함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백사는 병조 판서․이조 판서․대제학을 겸하여 안으로는 국사에 힘쓰고, 밖으로는 명나라 사절의 접대를 전담하였다. 명나라 사신 중에 양방형(楊邦亨)과 양호(楊鎬)가 있었는데, 백사의 일처리를 보고 양방형은, “동방에 이러한 인물이 있으니 어찌 외국이라해서 경솔히 보겠는가” 하였고, 또한 양호는, “이판서라야 한다. 이판서라야” 하며 존경하였다. 1598년 우의정에 임명되고, 1600년 영의정에 올랐으며, 다음해에 호종공신(扈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그러나 1602년 정인홍(鄭仁弘)과 문경호(文景虎)가 성혼(成渾)을 탄핵하자 그를 비호하다가 정철의 편당으로 몰려 영의정을 자진 사퇴하였다. 이 후로는 어떤 당파에도 속하지 않고 혼자 의연히 지냈는데, 이를 두고 북인(北人)의 정여립 등이 온갖 공격을 다 하였다. 훗날 이정구는 백사를 평하기를, “그가 관직에 있기 40년, 누구 한 사람 당색에 물들지 않은 자가 없는데, 오직 그만은 초연히 중립을 지켜 공평히 처세하였기 때문에 아무런 당색을 찾을 수 없었으며, 또한 그의 문장은 이러한 기품에서 이루어졌 으니 뛰어나지 않은 것이 없다” 라고 칭송하였다.
관직을 물러나 노원(蘆原)에서 산 백사는 두어 간 초가집에 거친 음식조차 충분치 못하였으나, 문을 굳게 닫고 객을 사절한 채 두루 경전 및 서적을 읽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한편 으론 산수를 즐기어 좋은 계절이면 한 둘의 자질(子姪)을 데리고 골짜기를 찾아 시를 읊으며 소일하다 돌아왔다. 한번은 미복으로 나귀를 타고 소양강에 이르니, 한 배에 탄 젊은이들이 정승인 줄을 모르고 여기까지 온 이유를 물었다. 백사가 말하기를, “이 곳의 산수가 좋다는 말을 듣고 살아볼까 하고 왔오” 하였다. 젊은이는 더욱 방자해져 등 너머로 한 산을 가르키며, “오래 전부터 이 산이 떠서 들어왔기에 이 곳에 살면 부자가 된다 하는데, 당신도 와서 살면 좋을 것이요” 하고 놀린 뒤, 귀에다 대고 서로 말하기를, “이 사람이 관자놀이에 옥관자가 둥그니 필시 곡식을 바치고 당상관 벼슬을 산 사람인 모양이네” 하고 말하며 가버렸다. 공이 희롱하여 시 한수를 읊기를,
만년에 소양강 아래서 (晩計昭陽下)
그대들과 함께 낚시대로 늙으리 (同君老一竿)
생계가 박할까 근심하지 말게 (莫憂生事薄)
부래산이 있네 (自有浮來山)
백사는 농담을 즐겨 하였는데, 일찍이 비변사(備邊司) 회의가 있는 날 유독 다른 사람보다 늦었다. 주위에서 책망하자 손을 내 저으며 말하기를, “싸움 구경을 하다가 늦었오. 글세 환자(宦者:고자)가 중(僧)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중은 환자의 불알을 쥐고 큰 길 한복판에서 서로 싸우고 있었오” 라고 익살을 부렸다. 당치도 않은 익살에 여러 재상은 배를 쥐고 웃었다 한다.
북청에서 죽음을 맞은 백사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인홍 등 북인은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臨海君)과 선조의 장인인 김제남(金悌男)과 일족의 멸살, 영창대군의 살해 등을 일삼았고, 급기야는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仁穆大妃) 김씨(金氏)를 평민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이러한 패륜 행위에 대하여 백사는 목숨을 걸고 싸웠고, 급기야는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었다. 미리 죽음을 예견한 백사는 북청으로 떠날 때 장사를 지낼 장의 용품을 챙겨서 따르도록 명하고, 이어 아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내가 죽은 후에 조복(朝服)으로 염하지 말고 다만 심의(深衣)만 써라”하였다. 북청으로 가는 길에 철령을 넘으며,
철령 높은 재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怨淚)를 비 삼아 띄워다가
님 계신 구중궁궐에 뿌려 본들 어떠하리
라고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북청에 유배돤 백사는 강윤복(姜胤福)의 집에 머물렀는데, 그 집은 가산이 퍽 윤택하여 먹고 사는 것이 어렵지 않고 오히려 풍족하였다. 이에 대문에다 회롱하여 쓰기를,
사람이 곤하게 공부하여 정승이 될 필요가 없고 (人生不必辛勤作宰)
강윤복같이만 되면 족하리 (相得如姜胤福足矣)
하였다. 이 곳에서 백사는 1618년 5월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63세요, 사후 문충(文忠)의 시호가 내려졌다. 백사가 죽자 인근 사민(士民)들이 부음을 듣고 곡하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도내의 선비들은 각기 글을 가지고 와 제사를 지냈다. 그 중 한 선비는,
오주(鰲柱)가 하늘을 떠 받들어 하늘이 평온터니 (鰲柱擊天天妥帖)
자라 죽고 기둥 부러지니 하늘을 어이하리 (鰲亡柱折柰天何)
북풍이 비를 불어 보내니 (北風吹送囚山雨)
내가 흘린 눈물 비보다 많도다 (我淚多於此雨多)
동해 바다에 있는 삼신산(三神山)은 물에 떠 있는데, 여섯 자라가 산을 머리로 떠 받들고 있다는 전설이 있다. 백사가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이므로 나라의 기둥이 되었다가 세상을 떠났음을 한탄하는 시이다.
백사가 사랑한 오씨의 유택
잔디가 잘 가꾸어진 구릉에는 위에 쌍분으로 된 백사의 묘에는 문인석과 망주석 그리고 상석과 향로석이 나즈막하게 놓이고, 쌍분 가운데에 묘비가 있다. 오랜 세월을 지낸 묘비에는 ‘議政府領議政 鰲城府院君李公之墓. 貞敬夫人 安東權氏祔’라고 쓰여 있다. 묘는 호석 없이 매우 단촐한 형식인데, 이 곳은 백사(白沙)의 고향으로 북청에서 세상을 떠난 뒤 이 곳에 모시었다. 임종 전에 장례는 지극히 간단히 하라고 친히 일렀을 정도이니 묘가 소박한 것은 당연하지만, 그래도 조선 명재상의 묘라 생각하니 좀 화려하였으면 싶다. 묘의 옆과 뒤에는 노송(老松)이 둘리어 있다. 포천의 넓은 들판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풍광 좋은 곳에 있는 묘의 뒷쪽에는 백사와 더불어 많은 일화를 남긴 오씨(吳氏) 부인의 묘가 있다. 오씨의 묘는 2개의 동자상에 망주석 그리고 낮은 상석을 배치하였는데, 근래에 후손이 세운 큼직한 묘비는 오석(烏石)에 옥개석까지 갖추었다.
정작 백사의 묘비는 화강암 재질에 극히 소박한 반면, 후실의 비는 매우 큼직하고 휼륭하여 백사가 살았으면 혼이 났을 것이다. 묘비에는 ‘貞敬夫人 錦城吳氏之墓’라 쓰여 있고 그 옆에는 몇 백 년은 묵었을 향나무가 용트림을 하고 있다. 전하는 이야기로 오씨는 천민이었다고 한다. 젊어서는 이덕형과 함께 교우를 하였는데, 처음에는 한음 이덕형에게 마음을 두었었다. 그러나 장난기 심하고 재치 있는 백사가 오씨를 차지하였다. 훗날 오성이 장난 삼아, “당신은 한음을 좋아하더니 왜 나에게 시집을 왔오?”하니 “그래야만 당신께 시집 올 수 있지요” 하였다 한다. 오씨는 총명하고 사리가 분명하여 남편을 극진히 모셨는데, 임진왜 때 임금의 대가를 모시고 북쪽으로 가려던 차 집에 들리니, 차려온 밥 그릇에 밥이 반만 있었다. 이는 식구는 생각하지 말고 빨리 떠나라는 뜻이 담겨 있기에 그 길로 백사는 대가를 따라 갔다 한다. 백사가 북청으로 귀양을 갈 때 탄식하며 이르기를, “내 시집 올 때 이 일을 못내 걱정하고 염려하였더니 기어코 벌어지고 말았구나. 이 것도 팔자이니 어떻게 하겠는가” 하며 따라 갔다 한다. 평생 백사를 위해 헌신한 여인이며, 백사가 어려울 때 용기를 주고 간호해 준 오씨 부인이다.
선조가 의주에 있을 때 하루는 인빈 김씨가 친정 아버지 제사를 지내고 대신들을 위하여 제사 음식을 보내왔다. 마침 그 자리에 영의정 윤두수(尹斗壽)가 없자, 백사는 그 음식을 가져 오라고 하더니 좋은 것만 가려 먹었다. 배불리 먹고 난 뒤 백사는 영의정이 오자 먹다 남은 음식을 주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영의정은 화를 벌컥 내면서,“식량이 없어 임금 수랏상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는데 무슨 제사를 지내느냐” 하며 즉시 선조에게 달려가 고하였다. 이를 들은 선조는 김씨를 혼내고 그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백사는 껄껄 웃으면서, “내가 진작 그럴 줄 알었지” 하며 입맛을 다시니 그 재치는 아무도 당하지 못하였다. 또한 북청으로 귀양 가며 일가 친척에게 작별의 시를 써 주었는데,
구름 낀 날이 쓸쓸해 한낮도 음침하고 (雲日蕭蕭晝晦微)
먼 길 가는 나그네 옷을 북풍이 불어 찢네 (北風吹裂遠征衣)
요동 성곽은 아마 예와 다름 없으련만 (遼東城郭應依舊)
영위가 돌아오지 못할까 두려워할 뿐이네 (只恐令威去不歸)
라 하며 눈물을 감추었고, 북청에 머물며 만감(萬感)을 되새기며 어느 날 밤 시를 읊기를,
밤 새워 앉아 돌아갈 길 재어보니 (終宵嘿坐筭歸程)
새벽 달이 엿보는 듯 창을 비춰 들어오네 (曉月窺人入戶明)
갑자기 하늘 끝을 지나가는 외기러기 (忽有孤鴻天外過)
아마 저 것도 응당 한양성에서 왔으리 (來時應自漢陽城)
어릴 적에 백사가 절로 공부를 하러 갔다. 절 밥이라 반찬이 맛이 없자 하루는 밥상을 놓고 옆 종 아이에게 이르기를, “내가 밥을 숫가락으로 뜨면 너는 게장하고 외처라”
하였다. 백사가 밥을 뜨자, 그 종이, “게장” 하니, “거 맛있다” 하며 밥을 먹었다. 몇 번을 되풀이 하니 그 종은 짜증이 나 그만, “게장, 게장” 하였다. 그러자 백사는 “짜다, 짜다” 라고 외치며 능청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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