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제희의 풍수칼럼
목록으로
  지구자전설을 주장한 실학자, 홍대용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 본관이 남양(南陽)이고, 자(字)는 덕보(德保), 호는 담헌(湛軒)이다. 청주에서 출생한 담헌은 부친이 나주목사를 역임하여 어린 시절은 나주에서 보냈다. 이 때 나주 근처 동복(同福)에는 천문학자 나경진(羅景鎭)이 살고 있었다. 담헌은 그 집에 가서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관측하는 혼천의(渾天儀), 자명시계인 후종(候鍾)을 보면서 그 원리 및 방법을 연구하기도 하고, 직접 만들기도 하면서 천문학에 심취하였다.

  천문학에 눈을 뜬 담헌은 청주 본가에 사설 천문대인 '용천각(龍天閣)'을 짓어 기구들을 마련하고 더욱 천문학에 정진하였다. 이 때 '지구가 스스로 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박지원( 朴趾源)같은 분만이 이해하고, 조정 대신들은 여전히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天圓地方)'하며 그의 주장을 한낱 괴담(怪談)이라고 일축하였다.

  담헌은 1765년 홍억(洪憶)이 동지사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가자 군관 직책으로 동행하여 청나라의 과학자들과 사귀었다. 이 때도 담헌이 청나라 사람에게 '지구자전설'을 설명하자, 그 이론에 그들은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이리하여 담헌의 '지구 자전설'은 청나라까지 알려지게 되었고, 일약 과학자로 이름이 알려졌다. 그러나 과학 서적을 연구하느라 번번히 과거에는 낙방하였다. 혁혁한 문벌 집안의 후광을 입어(조부가 대사간·부친이 목사) 음직(蔭職)인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에 등용되었고 이내 사헌부 감찰을 지내게 되었다.

  북경에 갔을 때 과학 기재와 고서적을 파는 유리창(琉璃廠)에 들렸다. 그 곳에 진열된 여러 과학 기재를 관찰한 인연으로 중국 지식인이었던 엄성(嚴姓)·반정균(潘庭筠)같은 사람들과 밤 새는 줄 모르고 학문과 문학을 토론하며 깊은 우정을 맺기도 하였다. 후에 박지원이 청나라에 갔을 때 그를 소개하는 편지를 써 줘 그가 그들과 사귀도록 하여 국경을 뛰어넘는 우정으로 발전하였다. 엄성이 죽자 반정균이 홍대용에게 부고를 하였고, 이어 담헌이 죽자 이번에는 박지원이 반정균에게 부고를 할 정도였다.

  담헌이 북경을 다녀 온 후 그 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연기(燕記)」와 「회우록(會友錄」이란 책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탑골 박지원 사랑채에 모인 조선의 젊은 지식인들에게 알려 주어 자연히 북학파(北學派) 모임이 이루어졌다. 이 때 사랑채에 모여 신학문을 연구한 사람으로는 이덕무·박제가·이서구·유득공 등으로 이들은 모두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였다.

  담헌의 기하학 원리를 적은 「주해수용(籌解需用)」과 현실 개혁 방안을 제시한 「임하경론(林下經論)」의 두 책 중「임하경론」을 보면 , "놀고 먹는 자가 많고 생산하는 자가 적다. 마땅히 법을 엄하게 세워 4민(四民:사농공상)에 속하지 않고 놀고 먹는 자는 관에서 형벌로 다스려야하며, 재주와 학문이 있으면 농부나 상인의 자식이라도 벼슬에 하여도 되고, 사람됨이 나쁘고, 재주와 학문이 없으면 높은 벼슬아치 자식이라 할지라도 하인이 되어도 한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라 하여 신분의 차이를 두지 말것, 언론의 평등을 꾀할 것, 신분제도를 없앨 것 등 당시로써는 혁신적인 주장을 서슴치 않고 하였다.

  그러나 담헌은 이론에만 치우쳤는지 직접 태인감과 영천군수를 지내면서는 자신의 학설을 실정에 적용하지 못하였다. 동궁 시절 학문을 가르키던 정조가 왕위에 오르고, 권신 홍국영(洪國榮)이 정권을 유린하자 병을 핑계로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청주로 돌아왔다. 벼슬이 변변치 못하였던 담헌은 극도로 가난하게 살았고, 모친을 봉양하기 위하여 억지로 벼슬을 하였다고 술회할만큼 과학 기술 보급에 힘쓰다 청주에 온 후 일년도 못되어 중풍으로 절명하였다.

  담헌이 운명하자 연상(年上)의 친구인 박지원은 한 걸음에 달려 와 통곡을 하였으며, 술이 곤드레 만드레되어도 술사발을 놓지 않고 슬퍼하였다. 묘지명을 써 달라고 부탁하자,
  "아 슬프다. 덕보는 민첩하고, 겸손하고, 식견이 원대하여 사물의 이해가 정밀하였다. 일찍이 지구가 한 번 돌면 하루가 된다고 하여 그의 학설이 오묘하였다........"
라고 하였다. 담헌은 죽은 후 생전 남긴 과학 기술 연구가 「담헌서」에 담겨져 박제가(朴齊家)·이덕무(李德懋) 등으로 이어지니 우리의 과학 기술사에 찬란한 빛을 더하였다.

  조촐한 담헌의 묘
  병천에서 593번 국도로 약 1.5km쯤 가면 낮은 고개 못미친 곳에 수신면 장신리가 있고, 도로 오른쪽 낮은 야산에는 실학자 홍대용(洪大容)의 유택이 있다. 석재 공장 한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약 50여m 올라가면 양옥집이 한채 나타나고, 그 왼쪽 산 밑에 노송이 곡장을 둘러친 담헌의 유택이 있다.

  약간 구릉을 이룬 묘 앞에는 잔디가 곱게 자라고 묘와 석물은 단촐하다. 호석이 없는 봉분 앞에 낮은 상석으로 되어 있고, 양쪽에는 망주석이 있다. 묘비에는 '湛軒洪公大容之墓. 淑夫人韓山李氏 左'라 씌어 있는데, 오석으로 된 비신은 화강암으로 된 방형의 기단 위에 팔작비붕 옥개석을 얹고 있다. 암울한 시대 선각자들이 겪었던 외로움과 절망감을 딛고서 철학과 역사 그리고 과학에 대한 여러 저술을 남긴 담헌의 정신은 현대를 사는 우리 모두가 본 받아야 할 것이다.

  영조 때 임금의 말수레를 끌던 '벌대춘'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찌나 수염이 길고 보기 좋았는지 보는 사람마다 그 수염을 부러워하였다. 그러나 수레를 몰 때마다 수염이 바람에 날려 임금의 얼굴을 스치자, 그는 임금의 노여움에 죽지나 않을까 두려워 하루는 수염을 모조리 깎았다. 이를 본 임금이 사연을 묻자 그는 자초지종을 아뢰었다. 그러자 영조는 버럭 화를 내며, "네 이놈. 나는 네놈보다 네 수염이 좋아 네놈을 부렸거늘, 네 마음대로 수염을 깎았으니 너를 더 이상 부릴 수 없다." 하며 볼기짝을 때렸다 한다.


처신의 귀재 한명회

아우내 장터와 추모각, 류관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