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북리 시내를 거처 43번 국도를 통해 달리는 차는 산을 하나 넘더니 이내 오산리이다. 이 마을은 길가와 인접하여 있고, ‘유공 주유소’ 뒷편 산에는 병자호란 후 청에 끌려가 죽은 삼학사 오달제(吳達濟)의 묘가 있다.
청(淸)나라에 남긴 고혼
오달제(吳達濟, 1609~ 1637)는 본관이 해주(海州)이고, 호는 추담(秋潭)으로, 1635년 정언․지평을 거쳐 1636년 수찬․부교리를 지냈다. 추담은 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과 더불어 삼학사의 한 분이다. 삼학사는 병자호란이 끝난 후 강화 조약에 의하여 왕세자와 함께 청나라로 끌려 갔는데, 그들의 충성심과 인덕에 적장 용골대가 감동하여 죽이지 않을려고 항복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삼학사들은 ‘선비는 같은 하늘 아래에서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강한 신념과 불굴의 의지로 그들의 협박과 유혹에 회유당하지 않아 마침내 살해되었다.
병자년의 치욕
당시 조선은 중국 명(明)나라와 친분을 맺고 있었는데, 인조 5년 여진족 두목 누루하치(奴兒哈赤)가 부족을 통일하고 후금(後金)을 일으켜 세력이 강력하여졌다. 후금이 국교를 요구하자 조선은 명나라와 두터운 관계로 그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에 앙심을 품은 후금은 인조 14년(1636년) 국호를 청(淸)이라 칭하는 동시에 태종인 누루하치가 아무런 사전 통보 없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해 왔다. 그 해가 마침 병자년(丙子)이어서 이를 병자호란이라 하는데, 그들은 12월 12일 심양[奉天]을 떠나서 여드레만에 압록강을 건너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왔다. 아무런 방비가 없었던 조선은간신이 의주(義州) 부윤 임경업(林慶業)이 백마산성(白馬山城)에서 그들을 막아 선전하자, 그들은 침략 진로를 바꾸어 곧바로 한양으로 밀고 들어 왔다. 조정은 명나라에 급히 사신을 보내 원군을 청하니 명나라 또한 국내 사정으로 원군을 보내오지 않았다. 이 때 조정의 예조 판서 김상헌(金尙憲), 이조 참의 정온(鄭蘊) 등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는 척화론(斥和論)을 내세우고, 영의정 장유(張維), 호조 판서 최명길(崔鳴吉) 등은 항복하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자는 화친론을 주장하며 대립이 극심하였다.
청나라의 군사는 한양을 함락시키고 다시 남한산성을 이중 삼중으로 에워싸 조선의 연락을 차단한 채 사방에서 총공격을 하였는데, 성안에 있던 조선의 1만 2천 명의 군사는 계속되는 싸움에서 죽고 부상 당하여 사기가 크게 떨어지고, 또한 먹을 식량은 50일 분도 되지 못하였다. 피난 후 싸움이 45일이 경과되자 조선의 관료와 군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더 이상 싸울 기력을 잃었고, 이에 인조는 항복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에 조선은 전쟁 시작 후 한달만인 정축(丁丑) 1월 30일 청나라에게 항복하며 화친을 요구하였고, 청나라 태종은 영원히 조선을 속국으로 삼고자 가혹한 항복 조건을 내 세웠다. 청나라의 무례하고도 잔혹한 요구을 물리칠 힘이 없던 조선은 마침내 인조가 왕세자와 함께 맨발로 수항단에 걸어나와 항복의 절을 올렸으니, 이는 실로 한민족 오천 년 역사에 가장 치욕스런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청나라는 조선의 선량한 백성의 가산을 모조리 쓸어 갔고, 또한 젊은 부녀자를 포함하여 5만 명이 넘는 백성을 포로로 잡아 갔다. 훗날 조선은 화친 후 ‘포로 반환’을 간절이 요구하였는데, 청나라는 그 보상책으로 일반 백성은 백 냥, 부녀자와 지위가 높은 남자는 신분에 따라 2백 냥에서 1천 5백 냥까지 엄청난 보상금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재정이 고갈된 조선은 국가에서 돈을 들여 그들을 귀환시킬 수 없었고, 일반 백성은 형편에 따라 재산을 털어 가족을 돌아 오게 하였다. 이 때에 생긴 말이 환향녀(還鄕女)이다.
의대(衣帶)만 모신 추담(秋潭)의 유택
추담(秋潭)의 유택은 모현면 오산리 산 47번지에 있으며, 입구에는 신도비와 그 뒷쪽에는 하늘을 찌르는 전나무가 있다. 몇 백년은 된직한 이 나무는 장방형 기단에 팔작지붕을 얹은 신도비 만큼이나 의젓하고 당당해 보인다. 농가 옆 길을 오르면 소나무가 양쪽으로 시립한 산 길이 있고, 그 입구에 안내판이 서 있다. 가파른 길을 오르니 묘 3기가 삼각형의 형태로 모셔져 있는데, 앞 쪽에는 부인 2분의 묘를 나란히 모시고 뒷쪽 중앙에 추담을 모시었다. 부인들 묘 중앙에는 ‘贈貞敬夫人 宜寧南氏之墓. 贈貞敬夫人 高靈申氏之墓’라고 새긴 비석이 있고, 추담의 비석은 없다. 그러나 묘 앞 쪽 문신석은 크기가 동자상만 하여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끼가 끼인 점으로 보아 이 석물은 부인들 묘의 석물이었으나, 그 후 추담의 의대를 모시면서 그대로 세운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신도비는 화강암으로 김조순(金祖淳)이 짓고, 이상근이 글씨를 썼다. 멀리 정(鄭)포은의 산소가 바라다 보이는 추담의 묘는, 의절(義節)의 외로운 혼들이 세월을 뛰어 넘어 왕래하는 듯하다. 유택을 떠나면서 추담이 심양 옥중에서 지은 시를 읊조렸다.
정이 깊어 금실이 좋았는데 (琴瑟因情重)
만난 지는 두 해도 못 되었네 (相逢未二朞)
만리 먼 길을 헤어졌으니 (今成萬里別)
백 년 해로하잔 말은 빈 말이었네 (虛負百年期)
땅은 넓어 편지도 보내기 어렵고 (地闊書難寄)
산 멀어 꿈 길도 더디네 (山長夢亦遲)
내 목숨 어찌될 지 알 수 없으니 (吾生未可卜)
뱃 속의 아이를 잘 부탁하오 (須護腹中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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