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제희의 풍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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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 수호의 수장, 전형필



   한 나라를 이야기할 때면 먼저 그 나라의 역사를 살펴보고, 역사를 이야기할 때는 문화재를 들먹인다. 문화재는 지난 시대와 시간의 간격을 메꾸어 주는 가교(架橋)요, 미래를 예견하는 거울이기에 그렇다. 보통 ‘민족의 영광’이라 일컬어지는 문화재는 한 민족의 참된 본디의 모습, 그들이 희구하던 삶의 소망을 이 시대에 들추어 볼 수 있는 ‘타임 캡슐’이며, 또 이 시대를 통과해 후손에게 물려줄 가장 가치 있는 유산이다.

   1930년대 초, 일제가 전국에 산재한 옛 무덤을 도굴하고 골동가를 뒤져 우리의 문화재를 일본으로 빼돌리고 있을 무렵, 우리 문화재를 수집, 정리하고 보존하는데 그 젊음과 재산을 바치기로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조상으로부터 십 만석의 재산을 물려받은 전형필이다.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나라 잃은 백성들의 수치와 절망을 뼈저리게 체험하고, 이에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문화 전통을 상실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세창을 만난 전형필은 평생을 바쳐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여 조국 광복의 기반을 이루고 나아가 광복된 조국에서 문예부흥의 근거를 마련하겠다고 결심하였다. 오세창은 추사학파의 전통을 이은 고증학자로 서화골동의 감식에 있어서는 당대 제일로 통하던 분이다. 또 우리 역대의 서화사를 총정리하여 18년만에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이란 책을 편찬하기도 한 학자이다.

   오세창의 지도를 받으며 문화재를 수집한 전형필은 이순황이란 골동 거간을 중개인으로 내세워 ‘한남 서림(翰南書林)’이란 고서점을 운영하며 고서화와 서책을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시중 가격보다 2~3배의 웃돈을 얹어 주니 시장에 흘러나온 명품들은 거의 빠짐없이 그의 손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골동상들은 그가 나타나기만 하면 부랴부랴 숨겨 두었던 명품들을 꺼내 진열하고, 그는 그 중에서 일품 위주로 수집하였다. 오세창의 안목을 보탠 그의 감식안 역시 ‘당대 제일이다.’라는 평을 들었다.

   또 주로 서화와 도자기를 수집했지만 불상이나 석등, 석탑 등 불교 문화재도 일본으로 넘어갈 위기에 처해 있으면 돈을 구애받지 않고 서슴없이 구입했다. 일본까지 직접 사람을 보내 사 오기도 하고, 일본으로 반출되기 직전 인천항이나 부산항에 가 붙잡아 오기도 하였다. 그러자 1938년에 이르러 그의 소장품은 이미 방대해졌고 이들을 보존할 박물관을 필요로 하였다. 그러자 그는 미술품을 보간 내지 연구할 전당을 지었는데, 이것이 한국 최초의 사립 박물관인 보화각이며 지금의 간송 미술관이다. 보화각이 완성되자, 전형필은 곧바로 문예 부흥을 일으킬 인재를 양성하고자 보성중학교를 인수하였다.

   당시 일제는 황국신민화를 외치며 우리 민족을 말살하고자 했으나, 전형필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보성중학교 졸업반 학생들을 반드시 보화각에 데리고 와 문화재를 관람시킨 뒤에 졸업시켰다. 6. 25 동난 중의 일이다. 전형필은 우리 미술사에 없어서는 안될 귀중품만을 꾸려 부산으로 옮겼다. 그런데 서울 수복 후에 불길한 예감이 들어 부산에 보관 중이던 미술품을 무리를 하면서까지 서울로 다시 옮겨 놓았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난 직후 부산에 있던 보관창고에서 불이나 건물이 모두 불타 버렸다. 실로 엄청난 사건으로, 만약 그의 선견지명이 아니 였다면 문화재가 참담한 전화를 입었을 것이다. 이 일을 두고 그를 ‘문화재 수호신’이라고 불렀다.

   후덕한 인품으로 학자들과 혹은 술을 마시고 혹은 고적을 답사하길 좋아했던 전형필에게 시련이 닥친 것은 1950년 농지개혁법안이 통과되면서부터이다. 이 법은 지주가 소유한 농지를 소작인에게 분배되고, 그 대신 국가에서 토지 대금으로 지가증권을 준 것이다. 그런데 6.25전란을 치르면서 화폐가치가 한정 없이 추락하여 증권이 휴지로 변하였다. 심각한 재정적 어려움을 겪던 그는 설상가상으로 보성중고등학교에서 재정적인 사고가 터지자 침몰하고 말았다. 교장의 관리 소흘로 생긴 엄청난 빛은 그에게 힘에 겨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 빛을 대신 갚아 주면서까지 마무리하더니 결국 1962년에 불귀의 객이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가 땅을 치며 통곡하고 하늘을 우러러 원망하였다.

(사진: 문화재 수호에 앞장 섰던 간송 전형필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