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제희의 풍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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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예술품을 사랑한 야나기 무네요시


    ‘나는 조선의 예술, 특히 그 요소로 볼 수 있는 선의 아름다움은 실로 사랑에 굶주린 그들 마음의 상징이라 생각한다. 아름답고 길게 길게 여운을 남기는 조선의 선은 진실로 끊이지 않고 호소하는 마음 자체이다.’

    이 글은 일본의 저명한 종교 철학자이며 민예 운동가였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가 한 말이다. 그는 3대에 걸쳐 한국과 그 예술에 심취하면서 한국인을 옹호하고 그 예술을 찬미한 사람으로 우리와 가깝다. 그가 처음으로 이 땅을 찾아온 것은 1916년이다. 당시 일제는 조선을 그들의 식민지로 영원히 통치하기 위해 우리의 역사를 날조하고 문화를 말살하기에 광분하던 때였다. 그런 상황에서 그만은 우리의 입장을 옹호하는 글을 쓰고 강연을 하면서, 1922년 『조선과 그 예술』이란 책을 편찬하였다. 조선 총독부가 광화문을 훼손하려고 했을 떄는 〈사라지려 하는 한 조선 건축을 위하여〉란 글을 발표, 여론을 환기시켜 그것의 이전을 막았다.

    이 책에서 보이는 그의 예술관은 나름대로의 ‘자연과 역사에 대한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자연은 그 민족의 예술이 취해야 할 방향을 정하고, 역사는 그것이 밟아야 할 경로를 제시한다.’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조선 역사의 운명을 슬픔 것으로 본 점은 잘못된 역사 인식에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우리 민족이 3천 년간이나 학대와 구박 속에서 억압받은 슬픈 운명으로 보아 연민의 정이 가득차다. 하지만 그의 인식도 1930년대 들어서면 서 확연히 바뀌었다. 그는 귀족들이 쓰는 비싼 기물 대신, 이름 없는 장인이 만들었거나 백성들이 만들어 쓰던 도자기, 목공예품, 칠기 등에서 ‘비애의 미’가 아닌 ‘친근’, ‘소박’, ‘건강미’를 본 것이다. 특히 ‘무작위의 미’에 이르러서는 평화를 느껴, 더없는 애착과 존경의 마음까지 품었다.‘어째서 이것이 그토록 아름다운 것인가? 그 실체를 제 아무리 잘 표현하려 해도 그것이 가까울 수는 있어도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 표현하는 가운데 어딘가 지나치거나 혹은 빗나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가령 빗나가더라도 조선에 대한 강한 애정과 존경이 있는 한 그 오류를 훨씬 능가하는 진실된 언어로 호소할 따름이겠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민예’라는 말도 일본인 사이에 우리 것이 ‘조잡한 물건’이라 부리는 것에 반대하여 ‘민중적 공예’라는 뜻으로 그가 지은 말이다. 1924년 서울에 조선민족미술관을 개설하더니, 1931년에 잡지 《공예》를 창간하여, 우리 공예품의 우수성을 일본인에게 널리 알렸다. 1936년 일본민예관을 개관하고 관장으로 취임한 그는 1961년 뇌출혈로 숨을 거두기까지 한국의 미술품을 사랑한 사람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 지금까지 남아 있다.


(사진: 삼층책장, 조선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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