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호흡하는 순수 미.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은 바탕을 숨기지 않는 순수함에 약간의 파격을 준 자연과 호흡하는 미이다. 때깔을 보면, 파란 가을 하늘이 맑은 계곡 물에 어린 듯한 비취색이고, 형태를 보면 조롱박, 참외, 죽순 등 생활 주변의 자연 소재에서 따와 고향의 풋풋한 정감이 느껴진다. 또 문양은 청록색이 엷게 감도는 몸체에 보일 듯 말 듯한 신비한 상감 문양이 조화롭다.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은 보고 또 보아도 눈에 거슬리지 않은 순수한 미(美)이다.
그럼 어떻게 하여 고려 청자가 현대에 전해지게 되었을까? 20세기 초, 일본인들이 ‘고적 조사’라는 명분으로 강화도․ 개성에 있는 고분을 도굴해 전리품처럼 나누어 가지기 전에는 한 점의 고려청자도 이 세상에 나돌지 않았다. 조상의 무덤을 파헤쳐 부장된 유물을 꺼내어 감상한다는 것은 이 땅의 사람으론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상에 죄를 짓는 일은 고사하고 귀신 붙은 물건이라 생각하여 집안에 들이지도 않았다.
1905년 굴욕적인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다. 그는 대단한 한국 고미술품 애호가로 일본 천황과 귀족들에게 선물한다는 명목으로 무수한 고려자기를 일본으로 실어 갔다. 골동상으로 곤도(近藤)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개성 근처에서 도굴된 고려청자를 모조리 쓸어 모아 통감부로 보냈고, 때를 맞추어 서울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골동상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났다.
일본에서 거지 생활을 하던 사람도 이 땅에 넘어와 일본 순사를 앞세우고 무덤만 파면 일약 부자가 되어 떵떵거리고 살았다. 당시 일본에선 고려청자 한두 점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귀족 행세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자 이토가 부임한 2~3년 사이에 개성과 강화도의 고분은 모조리 도굴되어 바닥이 드러날 지경이었다. 청자가 귀해지자 급기야 석탑까지 들어올려 부장품인 사리함과 불상을 꺼냈고, 시골 구석구석까지 헌병까지 동원한 도굴꾼이 들어가 오래된 무덤이 있으면 모조리 훑어 갔다.
도굴에 가담한 하수인은 대부분 이 나라 백성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가난하고 무지하여 돈 몇 푼에 매수되거나, 혹은 총을 맨 일본인에게 협박 당해 어쩔 수 없이 도굴에 가담했을 뿐이다. 조상의 무덤을 판 뒤는 액운이 덮칠까 봐 이불을 뒤집어쓰고 두려움에 떨어야만 했던 선량한 백성들이다. 집에 전해 오는 백자 항아리나 접시만 보았지 청자가 이 나라 도자기인지도 몰랐다. 이런 사정은 왕실도 마찬가지였다. 고종 황제 역시 이완용(李完用)이 창경궁에 지은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을 관람하고는 처음으로 청자가 무엇인지를 알았다고 한다.
이왕가박물관은 이토의 사주를 받은 이완용이 고종 황제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1908년에 지은 것이다. 이 박물관은 이 땅에 들어 온 일본인 도굴꾼과 골동상이 도굴품을 한국 왕실에 합법적으로 팔아먹는 통로 구실까지 했다. 이토의 안내를 받은 고종이 박물관에 방문했을 때이다. 진열장에는 푸른 광기가 도는 고려청자가 형태별로 진열되어 있었다. 고종은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에 마음이 이끌렸다. 하나같이 때깔이 곱고, 형태도 아름다웠던 것이다. 진열된 고려청자를 관람하며 고종이 이토에게 물었다. “이 청자는 어느 나라에서 만든 물건이요?” “이 나라의 고려 시대 것입니다.” 이토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고종이 다시 말했다. “이런 물건은 이 나라에 없어요. 본 적이 없습니다.” 이토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이 땅에 고려청자가 나오게 된 사연은 일제 시대 일본인끼리 서로 거금을 주고 도굴된 청자를 사고 파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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