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관세음보살입상(金銅觀世陰菩薩立像, 보물 제195호)
부여에서 출토된 삼국 시대의 불상으로 높이는 21.1센티미터이다. 보살이 둥근 연화 대좌 위에 똑바로 서 있고, 머리에는 삼면 보관을 썼는데 치켜든 오른손에는 구슬을 잡고 있다. 보관의 앞면에는 화불이 조각되고 머리에는 큼직한 보계(상투)도 듬직하게 자리잡았다. 얼굴은 약간 크면서 둥글고, 몸은 호리하면서 길어 신체의 균형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두 빰은 통통하고 눈은 옆으로 가늘게 올려졌는데, 작은 입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넘친다. 양쪽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닿아 있고, 목에는 가느다란 목걸이를 걸쳤는데, 늘어뜨린 구슬 장식은 허리 부분에서 연화 장식이 중심이 되어 교차되었다. 이런 X자형 장식은 7세기에 유행한 보살상의 중요한 특징이다. 군의(裙衣)는 허리에서 한 번 접혀서 내려와 발등까지 덮고, 하지만 옷주름은 단순한 음각으로만 처리하였다. 왼손은 양어깨에서 흘러내린 천의를 살며시 잡고 있다. 얼굴에 나타난 미소와 부드럽고 생기 있는 조각이 백제 말기의 발전된 조각 양식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형과 아우가 헤어지다
1907년경이다. 충남 부여에 사는 한 한국인이 땅 속에서 우연히 무쇠 솥을 발굴했는데, 뚜껑을 연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속에는 금빛이 찬란한 불상이 두 분이나 들어 있었다. 합장을 한 뒤에 불상을 들어올리니, 형태와 빛깔도 완벽할 정도로 온전하고, 두 불상 모두가 비슷한 형태이나 크기만 약간 달랐다. 큰 것은 높이가 28센티미터이고, 작은 것은 21센티미터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불상을 가리켜 형과 아우 불상으로 불렀다. 불상이 무쇠 솥에서 출토된 사연에 대해서도 학자간에 해석도 분분했다. 결국은 어떤 급박한 상황에 처한 스님이 불상을 좀더 온전히 모시려고 솥에 넣고는 파묻은 것으로 결론지었다.
부여는 백제의 도읍으로 7세기 중반까지 백제의 문명이 화려하게 꽃피운 고장이다. 백제는 대단한 해상 대국이었다. 4세기경에는 한반도 중부와 남부를 포괄하는 넓은 영토를 차지하더니, 중국의 요서 지방과 산동 반도, 그리고 일본의 규슈지방까지 진출했다. 중국에서조차 천자의 나라로 인정하고, 중국의 남북조와도 활발히 교류하였다. 이에 비하여 신라는 영남 지방에 안주하여 대륙과 해상으로 기상을 뻗지 못했다. 훗날 신라의 장보고가 청해진을 근거로 해상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백제의 기운이 그 때까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공주에서 부여로 천도한 백제는 국력만큼이나 호화스럽고 사치한 생활을 즐기며 여유로왔다. 백제 미술품에 보이는 평화와 여유는 해상 대국으로서의 자신감과 풍족했던 생활이 반영된 것이다. 어떤 긴장감이나 불안의 그림자는 어느 구석에도 없다.
백제의 미소는 서산에 있는 마애삼존불에 잘 나타나 있다. 국보 제84호로 지정된 세 분의 마애불은 가야산 중턱에 천연의 절벽을 배경으로 도드라지게 새겨 있다. 가운데 석가모니불을 가장 크게 만들고 왼쪽 미륵보살과 오른쪽 제화갈라보살은 보다 작게 만들었다. 우리 나라 불상 중에는 무뚜뚝하고 때로는 엄격한 표정이 많은데, 이곳의 부처님은 큰 눈을 바로 뜨고 유쾌하게 웃는 모습일 뿐만 아니라, 둥글고 볼록한 빰은 복스런 어린아이를 닮은 듯하다. 그리고 미소는 한낮에 모심기를 끝낸 농부가 농주와 함께 새참을 배불리 먹고서는 땀을 닦으며 누우려는 바로 그 순간의 만족스런 표정 같기도 하다.
부여의 규암리에서 불상이 출토되었다는 소문은 금세 세상으로 퍼졌다. 그러자 부여에 파견되었던 통감부 소속의 헌병대가 불상을 빼앗았다. 그들은 불상을 강제로 빼앗고자 갖은 협박을 다했고, 결국은 나라의 물건이란 명목으로 압수했다. 나타나지도 않을 주인을 찾아 주겠다며 헌병대는 이 불상을 1년 이상이나 보관하고, 주인이 나타나지 않자 일본인을 상대로 경매에 붙였다. 발굴한 사람은 한 푼의 보상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경매에서 불상을 낙찰시켜 손에 쥔 사람이 바로 니와세 하쿠쇼(庭瀨博章)이다. 물론 일본인끼리 서로 짜고 한 경매이니 헐값이었다. 그러자 세상에서는 두 분의 불상을 가리켜 ‘니와세 불상’이라고 불렀다.
횡재를 한 니와세는 1922년경에 형뻘 되는 불상을 이찌다 지로(市田次郞)에게 팔았다. 이찌다는 대구에서 병원을 경영하던 의사로 금속류와 도자기 수집에 있어서 당대의 거물로 소문난 인물이다. 이찌다에게로 넘어간 불상은 숨이 막히도록 조형이 아름답고 화려했다. 이는 일본으로 불교가 전래된 6세기 중엽의 작품이고, 형식도 아스까(飛島: 6~7세기의 일본 문화)식과 비슷하였다. 일본으로 치면 최고(最古)의 불상인 셈이다. 이렇게 해서 무쇠 솥에서 발굴된 두 불상은 니와세와 이찌다가 각각 나누어 소장하였다.
어찌나 이찌다가 불상을 자랑하던지, 조선에 사는 일본인치고 그 불상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특히 오구라가 가장 탐을 냈다. 오구라는 신라 금관을 비롯해 많은 금속 유물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불상만 보면 언제나 주눅이 들었다. 거금 60만원까지 내놓으며 양보해 달라고 했으나 이찌다는 코방귀만 뀌었다. “나는 이 불상을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을 작정입니다. 아마 불상으로는 최고의 값이 나갈 테니까요. 아직까지는 연대가 가장 앞서거든요. 니와세에게 동생 불상을 팔라고 했습니다. 글쎄, 말이 걸작입니다. 오히려 저더러 형 불상을 팔라고 하더군요. 혼이 났습니다.” 어느 술좌석에서 이찌다가 한 말이다. 모두가 탐을 내며 군침을 흘리자, 그는 몰래 불상을 일본으로 가져갔다. 해방 전후의 일이다. 그러나 니와세가 소장했던 동생 불상은 우여곡절을 격은 후에 경성 제대에 근무하던 시노자키에게 옮아갔고, 그의 소장품으로 해방을 맞이했다. 그 역시 순식간에 전쟁 포로가 되었다. 그러자 미군정은 시노자키에게서 불상을 압수해 국립중앙박물관에 수장시켰다. 따라서 이 불상은 니와세, 시노자키를 거쳐 박물관에 안치되고,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95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이찌다가 일본으로 반출한 불상은 현재까지 그 후손이 소장하고 있다고 전한다.
위장 그물에 걸린 이찌다
악질적인 이찌다는 운 좋게 규암리 출토의 불상은 일본으로 빼돌렸지만, 그가 소장했던 대부분의 고미술품은 한국인의 덫에 걸려 산산이 흩어져 버렸으니 통쾌한 일이다. 이찌다 역시 우물 쭈물거리다가 해방을 맞았다. 미군정이 시작되어 동산문화재반출이 엄격히 금지되자, 그는 집에 가득한 고미술품을 어떻게 처분할까 고민했다. 어떤 일본인은 자진해서 헌납 목록을 만든 뒤에 미군정에 기증한다는 소문도 들렸다. 철통같은 미군의 감시는 일본인의 보따리로 보이는 족족 압수해 물자 영단(物資營團)으로 보냈다. 한 개 이상의 보따리는 일본으로 가져가지 못하게 했으니 헌납만이 유일한 길이었다. 그러나 일본인 중에는 운 좋게 몰래 숨겨서 떠난 사람도 있었다. 이찌다 역시 어떻게든 일본으로 가져가고 싶었다. 그래서 몰래 보따리를 꾸며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 양이 지게로 수 십 짐이 넘었다고 한다.
박종호(朴鍾浩), 그는 부산에서 자란 토박이 골동상으로 일본인들이 골동품을 보따리에 챙겨서 가져갈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래서 부산 시청 앞에 백양사(白楊社)라는 수송 회사를 차려 현수막까지 큼직하게 내걸었다. “일본까지 안전하게 물건을 운송해 줍니다. 요금은 보따리 당 1백원.” 말이 회사지 사무실과 창고만 있었고, 일본인들이 애지중지 모았던 고미술품을 송두리째 차지하기 위한 위장 그물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던 일본인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며칠이나 걸립니까? 그리고 어느 항구에서 찾아야 됩니까?” “특별히 중요한 물건은 오사카 항이고, 짐 보따리는 고베 항입니다. 기간은 2달 정도 걸립니다. 안심하세요.” “고맙습니다.” 박종호는 날마다 찾아오는 일본인에게 온갖 정성을 다 퍼부었다. 그러자 소문에 소문을 듣고 일본인들이 벌떼처럼 몰려와 짐을 맡겼다. 일본인들은 행여 한국인에게 보복이나 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데, 그들을 위하여 짐을 옮겨 준다니 너무나 고마웠다. 그들이 맡긴 보따리는 차곡차곡 박종호의 창고에 쌓였다. 운임 수입도 만만치 않아 박종호는 콧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그들이 코가 땅에 닿도록 절하고 맡긴 보따리는 다음 날이면 배에 실리는 것이 아니라, 돗데기 시장(국제 시장)으로 끌려나가 한 개에 2~3천 원씩 천지 사방으로 팔려 나갔다. 실로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을 팔아먹던 술책 그대로이다.
여기에 이찌다도 걸려 들었다. 첫 눈에 거물임을 알아채린 박종호는 이찌다를 정중하게 모셨다. 회사 내 칠판에는 방금 일본으로 떠난 배의 이름과 짐 보따리의 내용이 어지럽게 적혀 있었고, 연락책과 물건에 대한 서류도 잘 정돈되어 있었다. 물론 위장 전술이다. 이찌다는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우리 집에 조상 대대로 내려 오는 귀중한 물건이 있어 특별히 본토로 옮길까 찾아 왔습니다.” “2달 정도면 댁에서 물건을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박종호는 능란한 솜씨로 맞장구를 쳤다. 이찌다의 얼굴이 밝아지며 곧 많은 짐들이 날아왔다. 30여 지게 분량이었다. 두둑한 운임까지 받아 챙긴 박종호는 이찌다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곧 그 짐을 자기의 집으로 옮겨 풀어헤쳤다. 밤 새워 짐을 풀고 물건을 분류하는 동안 어느 새 아침이 되었다. 창문을 통해 햇살이 은은하게 비춰 들었다. 사방 탁자에 올라 앉았을 법한 달덩이 같은 백자, 금색이 번뜩이는 불상 그리고 비색이 눈을 찌르는 청자들이 방안으로 온통 가득했다. 밤새 노다지를 캐고 아침 햇살에 맞이하는 기분이었다. 박종호는 눈을 비비며 소리를 질렀다. “조상이 내려준 가보라고. 이것들이 어째서 너희 조상 것이냐? 우리 조상이 남긴 것이지. 암.”
박종호가 서울로 기별을 하자, 많은 한국인들이 기차를 타고 내려 왔다. 김청풍(金淸風: 경희 대학교 박물관)은 금동제 파관(破冠) 2점, 은제투각요대 2점, 은제관식(冠飾) 1점 등 10여 점을 구입했고, 김양선(金良善: 숭전대학교 박물관)은 동제 마구류, 세형동검 등 10여 점, 그리고 대구에 사는 이모(李某), 선우인순, 김동현도 이찌다 물건을 마음껏 입수하였다.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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