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제희의 풍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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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많은 패륜아, 연산군

    뱃길도 사나운 교동도

    양사면 창후리에서 교동도 호두포까지는 뱃길로 20여 분 걸리는 험한 뱃길이다. 이 뱃길에 부는 바람을 ‘연산작풍(燕山作風)’이라 하는데, 이 바람은 교동도에서 죽은 연산군이 그와 관계된 일로 이 섬에 오는 이를 해꼬지 하기 위하여 일으키는 바람이라 한다. 교동도(喬桐島)에는 연산군이 죽었던 곳에 그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세운 부근당(扶芹堂)과 교동향교와 교동읍성이 있어 그 자취를 찾고자 배를 탔다. 뱃전을 때리는 파도는 난간을 뛰어 넘어 갑판을 적시고, 그 때마다 배는 심하게 기우뚱거린다. 아무리 한이 맺혔기로 이처럼 심할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뱃길이 사나웠다. 이 섬은 강화군 교동면에 속한 섬으로, 화개산(華蓋山, 260m)을 중심으로 맑은 날에는 개성 송악산(松岳山)도 바라보여 실향민이 망향제를 지내기도 한다.

   고구려 시대에는 고목근현(高木根縣)이라 불렸고, 신라 경덕왕 때에는 교동(喬桐)으로 고쳐 혈구현에 속하였다. 조선 인조 때(1629)에는 수영(水營)을 화량진(花梁津)에서 이 곳으로 옮겨 현(縣)을 부(府)로 승격시키고 수군절도사 겸 부사를 두었다. 1633년에는 서남해의 방어를 한층 강화시키기 위하여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를 이 곳에 두니, 경기․충청․황해의 모든 수군을 총괄하는 군사의 요충지가 되었다. 지금도 그 흔적으로 남아 있는 화개산 성지(城趾)는 1173년에 축조된 것으로 추측되고, 교동읍성은 지금도 그 형태가 잘 보존되고 있다. 이 곳에서 서해로 멀리 떨어진 곳에 볼음도(乶音島)가 있다. 이 섬에 한번 가면 보름을 머물러야 비로소 다시 육지로 나올 수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하여 한 번 물이 빠지면 반 달이 지나 조수가 제자리로 돌아와야 배가 해안에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나운 뱃길이 있는 이 곳은 유배지와 몸을 숨기는 선비의 은둔처로 적당하여 연산군 또한 이 곳으로 유배되어 최후를 마친 것으로 보인다.



    연산군의 처량한 최후

   조선 9대 임금 성종(成宗) 7년(1476) 초여름에 임금의 총애를 받던 숙의 윤씨(淑儀尹氏)는 후사가 없어 걱정하는 성종에게 아들을 안겨 주었다. 산고의 진통이 있은 지 사흘째 되던 날 검은 구름이 대궐을 가리고 빗방울이 떨어지는 불길한 기운 속에서 윤씨는 왕자 융(隆)을 낳았고, 원자가 탄생하자 윤씨는 그 해 8월 왕비로 책립되어 일약 국모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성품이 모질고 질투가 심하였던 윤씨는 다음해에 임금의 총애를 받던 정씨와 엄씨를 저주하는 저주문과 그들을 죽이기 위한 비상약을 감추어 두었다가 발각되어 임금과 크게 다투었다. 이 싸움에 고집스럽고 표독한 윤씨는 임금의 용안에 상처를 내니, 이를 두고 궁중은 매우 시끄러웠다. 그러나 원자를 낳은 왕비라 그 죄가 용서되었다. 그 뒤 3년이 지났을 때 임금 내외는 다시 큰 싸움을 하여 또다시 임금의 얼굴에 큰 손톱 자국을 내었다. 먼저번에도 왕비를 폐하고자 하였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 대왕대비(世祖妃)는 급기야 영의정 윤필상(尹弼商)과 합세하여 윤비를 폐위시키고 왕비 윤씨를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켰다.

   한편 연산군은 숭례문 밖 순청동에 있는 강희맹(姜希孟)의 집에서 자라고 있었는데, 성격이 잔인하고 포악하여 개구리를 회초리로 때려 죽이거나, 음식을 가리지 않고 마구 먹기도 하였다. 성종은 윤비를 폐위한 지 3년 뒤 윤씨(尹氏)를 계비로 정하고, 이내 계비 윤씨를 연산군의 생모(生母)로 알게 함은 물론 생모 윤씨에 대한 언급을 일체 금지시켰다. 세월이 흘러 13세가 되던 해 연산군은 좌참찬 신승선(愼承善)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 폐비가 된 지 10년이 지났고, 그동안 많은 신하로부터 폐비를 보살펴 주어야 한다는 요구를 물리친 성종은, 어느 날 사냥 갔던 연산군이 소와 송아지 이야기를 하자 마음이 이끌려 폐비 윤씨에 대한 배려를 생각하고 폐비의 동정을 살피도록 명을 내렸다. 그러나 이 명을 알아차린 대비가 명을 받은 내시를 통하여, 윤씨는 반성은 커녕 지금도 상감에 대하여 대단한 앙심을 먹고 있다고 거짓으로 폐비의 실상을 전하게 하였다. 화가 난 성종은 즉시 이극균(李克均)에게 전지(傳旨)를, 이세좌(李世佐)에게 약사발을 가지고 가도록 명하였다. 당시에 사약을 받는 절차는 의금부도사가 전지를 읽어 어명을 거행토록 하면, 사약을 받는 자는 반드시 목욕을 하고 의관을 정제한 후 임금이 계신 방향으로 세 번 절을 하고 그것을 마셔야 하였다. 모든 절차를 끝낸 폐비 윤씨는, 원삼 소매 끝에 달린 한삼을 찢어 코와 입에서 나오는 피를 움켜 친정어머니 신씨(申氏)에게 주면서,“비통 망극한 이 어미의 원한을 풀어 주도록 동궁이 등극하면 부디 이 한삼을 전해주오”라고 유언 하였다. 연산군은 어려서부터 학문에는 뜻이 없고 놀기만을 즐겼으며, 세자부(世子傅)인 조지서(趙之瑞)와 허침(許琛) 중 강직하고 엄한 조지서는 멀리하고 모든 일에 관대한 허침을 따랐다. 16세 때에는 어전에서 성종이 각별히 사랑하던 사슴을 발로 차는 포악함을 보였고, 일찍이 여색(女色)을 탐하여 16세에 서인인 곽린의 딸을 예쁘다는 이유로 세자궁으로 맞아들이기도 하였다.

    1494년 갑작스럽게 성종이 승하하자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대관식 날 먼저 발로 찬 일로 성종의 꾸지람을 들은 사슴을 활로 쏴 죽이었고, 엄한 스승이었던 조지서로 인하여 유생들을 극도로 미워하였다. 그러던 중 을묘년 어느날 성종의 지문(誌文)을 읽다가 윤기무(尹起畝)라는 이름을 발견하고 어떤 직감이 있었든지 승지를 불러 그 사람에 대하여 물었다. 그러자 승지는 머믓거리며 결국 그가 폐비 윤씨의 아버지이며 연산군의 외할아버지라고 알려 주었다. 이 일로 연산군은 생모가 따로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고, 생모가 죽게 된 이유는 유생의 모략이라 생각하여 그들을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 어머니에 대하여 지나칠 정도로 연민을 느낀 연산군은 그 슬픔을 잊고자 정사는 게을리하고 날마다 궁중에 기녀를 불러 술과 춤으로 세월을 보내니 조정에는 간신들만 들 끓었다.

   그 당시 유자광(柳子光)은 일찍이 예종 때 남이 장군을 모략하여 죽인 장본인으로, 이런 유자광을 유학계의 대석사(大碩士) 김종직(金宗直)이 좋게 볼 리가 만무였다. 당시 유학계 거의 전부가 그의 제자인 점으로 미루어 정치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 김종직은 일찍이 함양군수로 있을 때에 동헌에 유자광의 시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소인배의 시를 걸어 둘 수 없다 말하며 떼어 불살라 버렸다. 이 사실을 들은 유자광은 복수의 앙심을 품었고, 김종직이 죽자 그의 제자 김일손(金馹孫)을 제거할 음모를 꾸며 마침내 사초사건을 계기로 1498년에 김종직의 제자를 비롯한 많은 선비를 죽이는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많은 선비가 죽자 간신배만이 조정에 가득하였고, 연산군은 더욱 더 주연과 여색에 빠져 갔다. 이러한 연산군에게 절세 요부(絶世妖婦)인 장녹수(張綠水)라는 다섯살 연상의 여인이 눈에 띠었다. 장녹수는 본래 예종대왕의 둘째 아들인 제안대군의 계집종으로 연회 도중 춤과 미색(美色)으로 연산군을 사로 잡은 것이다. 요부 장녹수에게 빠져 든 연산군은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더욱 많은 연회를 열어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고, 장녹수의 일거수 일투족에 희비가 엇갈렸다. 이성을 잃은 연산군이 사냥에 탐닉하고 온갖 연회로 국가 재정을 탕진하자 환관 김처선(金處善)이 목숨을 걸고 간언하였다. 이에 화가 난 연산군이 김처신을 향하여 직접 활을 쏘고 혀를 자르자, 김처선은 스스로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 헤치면서 죽었고, 그 후로 연산군은 ‘處’자 사용을 금하였다 한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지 10년이 되던 해 급기야 폐비 윤씨의 어머니 신씨는 윤비의 피가 묻은 한삼 자락을 가져와 보여 주며 원혼을 갚아 달라고 애원하였다. 외할머니로부터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연산군은 광란의 인물로 변하여 즉시 폐비사약 시말단자(廢妃賜藥始末單子)를 작성하여 올리라고 명하였다. 이 것은 윤씨 죽음에 관계된 모든 사람의 이름을 적어 올리라는 것으로, 이 일로 인하여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났다.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은 더욱 주색에 탐닉하며 정사는 일체 돌보지 않아 나라는 점점 더 어지러워지고 민심은 흉흉하여졌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당시의 어느 선비가 연산군이 난폭하고 호색한다는 등 연산군을 비방하는 글을 한글로 적어 투서하자, 이 일로 한글 사용을 금지하고 한글로 씌어진 모든 책을 불살랐고, 나아가 ‘기훼제서율(棄毁制書律)’을 제정하여 언문을 쓰는 자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엄벌에 처한다는 법을 공포하였다. 또한 투서한 범인을 잡지 못하자 사대문을 닫으라는 명을 내려 성 안의 사람들이 생필품을 공급 받지 못하여 굶어 죽는 자가 생겨, 백성의 원망이 높자 ‘신언패(愼言牌)’라는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 백성의 입을 막았다. 이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진 패를 목에 걸고 다니게 하여 입조심을 하도록 한 것인다.

입은 화를 가져 오는 문이오 (口是禍之門)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舌是斬身刀)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간직하면 (閉口深長舌)
어딜 가나 마음 편하리 (安心處處牢)

   이처럼 엄청난 함구령을 내리고도 두려운 마음이 가시지 않은 연산군은 이미 사람이 아닌 광인(狂人)이었다. 이조 참판 성희안(成希顔) 등은 연산군을 몰아 내고자 뜻 있는 자들을 규합하여 반정(反正)을 계획하여 실행에 옮기니, 이미 민심을 잃은 조정은 그를 제압할 힘이 없었다. 대궐을 지키는 병사들은 도망가기 바빴고, 그 때까지 온갖 간교로 호의호식하던 간신들은 단순에 목이 베어졌다. 연산군은 장녹수․전비․김귀비와 함께 잠을 자다가 졸지에 반정군에 의하여 침전(寢殿)에 유폐되고, 뒤를 이어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르니 이 분이 중종(中宗)이다. 새 조정은 침전에서 세 명의 요부(妖婦)를 죽이고 정비인 신씨와 세 왕자는 살려 주었으며, 회의 결과 연산군을 강화 교동으로 유배 보내도록 결정하였다.

   연산군이 배를 타고 교동으로 떠나는 날, 그를 따르는 사람은 나인 4명과 내관 2명, 그리고 호위병 뿐이었고, 닷새만에 교동에 도착한 연산군과 시녀들은 살 길이 막막하여 목놓아 울었다. 호위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당상관 심순경에게 연산군은 마지막으로, “그대가 나 때문에 이런 먼 곳까지 고생하여 왔으니 고맙기 한이 없노라” 하였다. 이 말은 왕위에 오른 지 12년만에 처음으로 나온 인정 있는 말로, 그 해 12월 우연한 병으로 죽음을 맞은 연산군은 평소 쳐다 보지도 않던 정비 신씨가 보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연산군을 모신 부근당(扶芹堂)

   부근당(扶芹堂)은 교동면 읍내리의 마을 뒤편 언덕 위에 있는데, 겉에서 보면 마치 창고와 같다. 30년은 됨직한 오동나무가 있는 이 사당의 지붕은 팔작지붕에 흰 페인트로 사면을 칠하고, 문에는 쇠로 된 빗장을 달았는데, 연산군이 병들어 죽은 집 터에 지은 것이라 한다. 이 사당은 연산군에 의하여 억울하게 죽어 구천을 떠 도는 많은 원혼들을 달래기 위하여 연산군의 화상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사당 안의 정면에는 왕과 왕비가 나란히 앉은 초상화가 있고, 그 밑에는 초를 비롯하여 향로등 제기가 놓여 있다. 벽에는 흰 한지를 네모지게 접어 끈에 걸고, 그 옆에는 남근목(男根木)을 매달아 놓았다. 액자에 걸려 있는 두 분의 초상화는 민화적인 그림으로, 상단부에는 중첩한 산봉우리에 천연색 구름이 날고, 아래에는 병풍을 둘렀으며, 병풍 앞 오른쪽에는 붉은 곤룡포에 검은 신을 신은 왕이, 왼쪽에는 초록 저고리 붉은 치마에 초록 신을 신은 왕비가 앉아 있다. 두 손을 소매 깊숙히 넣고 앞을 뚜렷이 응시하는 모습이 어느 평범한 대갓집 금실 좋은 내외간 같은데, 왕비의 앞에는 분홍 옷을 입은 하녀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조그맣게 그려 넣었다.



권력에 아첨한 시성, 이규보

존경을 받았던 장군, 김취려